세계화와 민족주의의 조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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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우리 모두 하나가 되었다. 지역과 계급, 세대와 성별의 차이를 넘어서 '대한민국'을 외치고 또 외쳤다. 많은 사람들이 놀라워했다. 그렇게 많은 인파가 모여서 '일심동체'가 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동시에 어떤 외국사람들은 섬뜩한 느낌마저 들었다고 한다. 저렇게 뭉친 애국심, 민족주의가 배타적이고 폐쇄적으로 흐르지는 않을까? 그러나 그것도 기우였다. 우리 국가대표팀에 대한 열성적인 응원이 상대국 팀에 대한 비방이나 증오로 표출된 예는 한번도 없었다.

심판의 판정에 대한 불만을 나타내는 속 좁은 외국사람들에 대한 비판, 거친 플레이를 통해 우리 선수들을 괴롭히는 외국선수들에 대한 야유는 있었지만 이런 것이 다른 국가나 민족, 인종에 대한 편견이나 증오로 확산되는 경우는 없었다. 오히려 우리를 상대로 열심히 싸운 나라의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냈고 그들의 국기를 흔들어주면서 환호해줬다. 심지어 우리를 이긴 나라의 선수들과 또 다른 '하나'가 되는 성숙함을 보여줬다.

민족주의·애국주의는 공동의 '적'이 있을 때 표출된다. 보통 때는 지역과 계급, 세대와 성별로 나뉘어 다투다가도 '우리 모두'를 위협하는 공동의 적이 나타나면 하나로 뭉치는 것이 민족주의요 애국주의다. 미국 같이 개인주의적인 사회에서도 걸프전, 9·11 사태 등 국가 전체의 명운이 달린 사건이 터지면 하나로 똘똘 뭉치는 것을 우리는 봐 왔다.

그런데 이렇게 뭉치는 민족주의와 애국주의는 늘 극단적인 배타성과 폐쇄성을 띠게 마련이다. 특정 국가나 종교·인종이 '적'으로 규정되고 비판과 공격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우리'가 아닌 사람들은 '우리'에 의해서 위협을 받게 되고 공포와 불안에 떨게 된다. '우리'는 하나가 되면서 일체감을 느끼고 축제를 벌일지 몰라도 '그들'은 철저하게 소외되고 배척받는다. 심지어 자유주의의 보루라는 미국에서도 9·11 사태 이후 특정 인종과 종교에 대한 차별이 심화되고 폐쇄주의가 부상하면서 논란과 비판이 끊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한국은 예외였다. '우리'를 강하게 느끼고 '우리'에 대한 자부심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표출되면서도 배타적이지 않았다. 왜일까? 첫째는 이번 월드컵이 우리의 성공과 성취를 자축하는 축제였기 때문이다. 경제위기에서 성공적으로 탈출한 데서 오는 안도감·자신감, 그리고 세계적인 대회를 또 한번 성공적으로 치르고 있다는 데서 오는 성취감이 우리의 '하나됨'을 긍정적이고 포용적인 것으로 만드는 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이번 월드컵을 계기로 표출된 한국의 민족주의와 애국주의가 배타적이고 폐쇄적으로 흐르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외국인'을 매개로 이뤄졌다는 사실 때문이다. '우리'를 하나로 엮어준 것은 역설적이게도 히딩크라는 네덜란드인이었다. '우리'가 아무리 '민족'을 강조하고 '외세'를 배척하려 해도 '우리 됨'을 가능케 한 것이 외국인이었다는 역설 아닌 역설 앞에서 폐쇄성과 배타성은 설자리를 잃는다.

우리는 히딩크라는 걸출한 외국인을 통해 축구의 글로벌 스탠더드를 받아들이면서 국내의 구습과 잘못된 관행을 깨뜨렸다. 그리고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외국인이 '우리민족'의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그 성공의 주체와 수혜자는 분명 우리였다. 글로벌라이제이션과 애국주의·민족주의와 이민족에 대한 수용이 동시에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이는 사실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일이다. 우리는 근세 이후 끊임없이 글로벌 스탠더드를 받아들이고 정착시키고자 노력해 왔다. 그러나 세계화와 민족주의가 조화될 수 있음을 이렇게 온 국민이 피부에 와 닿게 느낀 것은 처음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월드컵은 우리에게 분명 축구 이상의 것을 보여주고 가르쳐 준 값진 기회였다. 2002 월드컵이 우리에게 남겨준 가장 큰 교훈은 세계화와 민족주의가 얼마든지 조화될 수 있고 또 조화돼야만 우리의 성공과 번영을 기약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약력:미국 카알톤 대학 경제학사,존스홉킨스 대학 정치학 석·박사.(저서)『탈근대와 유교』 『유교,자본주의,민주주의』 (논문)'민족주의와 인종차별주의' '개국 대 쇄국:글로벌 스탠더드와 한국사'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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