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스위스 은행 겨누던 칼날 아시아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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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미국 정부가 싱가포르·홍콩 등 아시아의 조세 피난처에 대해 본격 조사에 나섰다. 이들 국가의 은행들이 느슨한 금융 규제와 고객 비밀주의를 활용해 미 부자들의 탈세를 돕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지난해 스위스 은행에 숨겨진 비밀계좌 적발로 거액의 세금을 추징한 미 정부가 이제 아시아 은행들에 조사의 칼날을 겨눈 것이다.

미 법무부는 유럽 최대 은행인 HSBC의 인도와 싱가포르 지점에 계좌를 가진 미국인들의 탈세 여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고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HT)이 9일 보도했다.

HSBC는 미국인들이 탈세를 목적으로 계좌를 개설했다는 사실을 알고도 예금을 유치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지난해 스위스 최대 은행인 UBS의 탈세 조사를 주도했던 케빈 다우닝 연방 검사가 아시아 은행들의 탈세 혐의 조사를 맡았다. HSBC는 도난당한 2만4000명의 HSBC 제네바 지점의 고객 계좌 정보가 미국 정부에 건네질 경우 타격을 입을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미 국세청(IRS)은 홍콩·싱가포르 등 세계적 금융 중심지에 사무실을 열고 미국인들의 탈세 여부를 조사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IRS가 홍콩·싱가포르를 시작으로 아시아 조세 피난처에 대한 조사를 확대할 방침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조세 전문 변호사인 애셔 루빈슈타인은 “IRS가 관심을 갖는 조세 피난처에는 영국령 버진 아일랜드와 파나마, 홍콩계 은행들이 포함된다”며 “IRS는 세계로 눈을 돌리고 있다”고 말했다.

미 법무부 전직 검사인 마이클 와인스타인은 “미국은 지금 미국인의 자산을 숨겨주는 전 세계 은행들을 들여다보고 있다”며 “UBS 조사는 단지 장기전의 시작일 뿐”이라고 말했다.

보스턴컨설팅그룹은 올해 보고서에서 외국 자산가들이 싱가포르와 홍콩 소재 은행들에 예치한 자금이 7000억 달러(약 850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했다. 스위스 은행 계좌에 들어 있는 외국인의 예금 규모는 2조 달러로 추정된다. IRS는 지난해 스위스 은행의 고객 비밀주의가 약화되며 스위스 은행에 예치된 미국인 자금의 일부가 아시아로 이동한 것으로 보고 있다.

IRS가 해외 계좌에 눈을 돌리는 것은 지난해 UBS 조사를 통해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둔 데 따른 것이다. 미국인 1만5000여 명은 지난해 11월 스위스에 탈세 목적의 비밀계좌가 있다고 자진 신고했다. 자진 신고하지 않을 경우 세금을 추징당하는 것은 물론 감옥에 갈 수 있다는 IRS와 미 법무부의 위협에 굴복한 것이다. 신고된 해외 계좌 소유주들은 세금과 이자·벌금 등으로 예금액의 40~50%를 추징 당해 수십억 달러를 세금으로 냈다. 당시 자진 신고는 UBS가 지난해 8월 탈세 혐의가 있는 미국인 고객 4450명의 명단을 미 정부에 넘기기로 한 데 따른 것이다.

미 법무부와 IRS는 UBS의 탈세 처리 절차를 아시아 등 전 세계 조세 피난처에 적용할 방침이다. 두 기관은 먼저 해당 국가의 은행들로부터 미국인이 보유한 비밀계좌를 넘겨받아 탈세를 적발한다는 계획이다.

미 조세 전문가인 빌 루시는 “미국의 새로운 세법들은 해외 계좌를 통한 탈세 방지에 역점을 두고 있다”며 “미 정부는 해외 비밀계좌 적발이 앞으로 수년간 세수를 늘릴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믿고 있다”고 말했다.

정재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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