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환율급락 좌시 않겠다" 잇단 발언에도 시장은 시큰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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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재정경제부는 지난 24일 서울 외환시장이 개장하기 전부터 "원화 환율이 특정 통화 동향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구두(口頭)개입에 나섰다.

지난 주말 시오카와 마사주로(藍川正十郞) 일본 재무상이 시장 개입을 자제하겠다는 듯한 발언을 하면서 엔·달러환율이 크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재경부는 이 여파로 원·달러 환율이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개장 전부터 선수를 친 것이다.

그럼에도 이날 원·달러 환율은 5.9원이나 하락, 18개월 만의 최저치인 달러당 1천2백13.5원을 기록했다.

◇별 효과 없는 구두 개입=구두 개입이란 환율이 급격하게 움직일 경우 정부가 시장에 경고성 신호를 보내 안정을 꾀하기 위한 조치다. 보통 재경부 고위 관계자 이름으로 블룸버그·로이터통신 같은 외신과 국내 인터넷 속보 매체들에 팩스를 보내 알린다.

문구는 대개 "원화환율이 급격히 변하는 것을 우려하며 지나칠 경우 시장안정 조치에 나설 것"이란 내용을 담고 있다.

또 재정경제부 장관이나 한국은행 총재 등 영향력 있는 고위 인사가 강연회나 기자회견에서 발언하는 경우도 있다.

정부는 이달 들어서만 이런 구두개입을 다섯 차례나 했지만 원·달러 환율은 하락세를 멈추지 않았다.

한 외국계은행 외환딜러는 "구두개입이 잦으면 약발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당국자의 발언도 딜러들 편한대로 확대 해석되거나 종종 무시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역효과 내기도=어설픈 구두 개입은 자칫 '불난 집에 부채질'이 될 수도 있다.

시오카와 마사주로 일본 재무상은 지난 21일 "우리는 시장을 컨트롤할 수 없다"고 말했다가 엔·달러 환율이 급락했다. 하루 1조달러가 거래되는 외환시장을 20억~30억달러의 물량 개입으로 통제할 수 없다는 원론적인 발언인데도 외환 딜러들은 일본 정부가 환율 개입을 자제하겠다는 신호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당국자의 말 한마디가 외환시장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미국에선 정해진 표현 외에는 말을 아낀다.

미국의 경제정책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앨런 그린스펀 FRB의장은 "환율은 재무장관 소관"이라며 아예 언급하지 않는다. 폴 오닐 재무장관도 "강한 달러정책은 변함이 없다"는 원칙적인 말만 되풀이할 뿐이다.

◇그러면 어떤 방법이 있나=정부는 최근 구두 개입만으로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공기업을 통한 간접적인 환율방어를 병행하고 있다.

한국전력공사는 다음달 1일 만기가 돌아오는 양키본드(미국에서 발행한 채권) 3억달러를 갚기 위해 산업은행에서 원화를 빌려 서울외환시장에서 달러를 매입했다. 달러를 사들이면 시장에 달러가 줄어들면서 가치가 올라가게 된다.

그래도 환율이 불안하면 정부가 직접 시장에 개입할 수밖에 없다. 산업은행 등의 창구를 통해 시중 달러를 사들이는 방법으로 달러가치를 올리는 것. 하지만 이 방법은 시장움직임을 왜곡시킬 우려가 있어 정부는 가급적 피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지금은 투기적 세력때문에 일시적으로 환율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라며 "미국경제 불안으로 달러화가 약세인 데다 외환위기 이후 완전 변동환율제를 채택했기 때문에 시장의 수급에 의해 환율이 결정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정부가 좌지우지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는 것이다.

정철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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