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의 금남로 밤샘 축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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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민주화 운동의 성지' 빛고을 광주에서 '월드컵 축구 4강' 신화가 써지는 순간 광주 월드컵경기장에 모인 4만여 관중은 서로 얼싸안고 "대~한민국"을 외치며 애국가를 합창했다.

코뼈가 내려앉아 안면보호대를 한 채 투혼을 발휘한 김태영 선수의 부인 조수임(29)씨는 "한국인의 혼을 보여준 남편이 너무 고맙다"며 눈물을 흘렸다.

붉은 물결을 이루며 경기장을 빠져 나온 관중은 백운광장과 순환도로를 거쳐 3㎞ 가량을 행진해 도청 앞과 금남로로 구름처럼 몰려 들었다.오가는 시내버스와 승용차 대부분은 태극기를 매달고 달렸다. 또 경적을 울리는가 하면 헤드라이트를 연신 켰다 껐다 하며 4강행을 기뻐했다.

전남도청 앞 광장과 금남로에 모인 시민 20여만명은 4강이 확정되자 지축을 흔드는 함성을 터뜨렸다. 축포가 잇따라 터지고 사물놀이패가 흥을 돋우는 가운데 주변 빌딩에서 오색 꽃종이가 뿌려졌다. 기쁨을 이기지 못해 윗옷을 벗어 흔들며 괴성을 지르거나 길바닥에 누워버린 사람, 벅차오르는 감격을 주체하지 못해 펄쩍펄쩍 뛰는 아주머니…. 모르는 사람들끼리도 서로 부둥켜 안으며 밤새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다.강인경(37·여·광주시 동구 산수동)씨는 "민주화의 성지인 광주에서 한국인의 숨은 능력을 보여줘 이렇게 자랑스러울 수 없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인근 아파트와 사무실 등에서 TV로 경기를 지켜보던 시민들은 "도청 앞으로" "일본에서 결승전을"이라고 외치며 금남로로 쏟아져 나왔다. 충장로와 예술의 거리에도 수만명의 시민이 몰려나와 연말연시보다 더한 북새통을 이뤘다. 호프집과 식당마다 '맥주·안주, 음식 공짜로 드립니다'라는 안내문을 내걸고 시민들과 기쁨을 나눴다.

상무시민공원과 쌍암공원 등에도 수만명이 모여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르고 '4강 필승 코리아 대축제'로 뒤풀이 마당을 펼쳤다.

이에 앞서 광주 시내는 오전 8시쯤부터 거리가 붉게 물들기 시작,정오 무렵에는 전남도청 앞 5·18광장과 금남로·상무시민공원 등에 50여만명이 운집해 응원 열기가 후끈 달아 올랐다. 칠순 노인부터 어린이까지 붉은 티셔츠를 입은 길거리 응원단은 뙤약볕 아래서도 준비해온 도시락이나 빵으로 점심을 대신하면서 구호와 노래를 부르며 응원에 몰두했다. 또 광주 월드컵경기장에는 오전 9시쯤부터 관중이 몰려 16만원짜리 3등석 입장권이 70만~80만원에 암거래되기도 했다.

광주 신세계백화점은 아예 문을 닫고 직원 2천여명을 길거리로 내보내 시민들에게 생수를 나눠주면서 함께 응원토록 했다. 대부분 상가들도 오전만 장사를 하고 오후엔 문을 닫고 경기 중계를 보거나 길거리 응원에 합류해 시 외곽 거리는 명절처럼 한산했다.

이날 광주시는 전국에서 몰려든 응원 인파를 감안해 대규모 길거리 응원장을 당초 두곳에서 일곱곳으로 크게 늘려 이들을 수용함으로써 안전사고를 예방했다. 월드컵 경기가 있는 날마다 자율적으로 시행해온 승용차 2부제 준수율이 90%에 이를 정도로 광주 시민들도 협조적이었다.

특히 광주·전남지역 총학생회연합회(남총련)가 한총련 합법화 등을 요구하려던 '통일 응원'도 학생들의 자제와 경찰의 노력으로 조용히 끝났다.

한편 광주시는 도심 간선도로 가운데 한 곳을 '히딩크 거리'로 지정하고, 다음달 1일 새 시장 취임 때 히딩크 감독과 선수들에게는 명예시민증을 주기로 했다.

광주=이해석·구두훈·천창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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