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진출 일본 탈락 '萬感'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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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18일 밤 안정환 선수의 골든골로 한국의 월드컵 8강 진출이 확정되는 순간 거실의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도쿄(東京)에 사는 10년지기 일본인 친구였다.

"갓타요(勝ったよ·이겼어).스고이(すごい·대단해). 얏타요(やったよ·해낸 거야)!" 전화선 너머로 들려오는 함성은 그곳이 일본인지 한국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친구의 휴대전화를 빼앗아 든 주위의 일본인들도 "간코쿠 얏타!(한국 해냈다), 간코쿠 간바레(한국 힘내라)"라며 축하를 아끼지 않았다.

친구는 내게 "축하한다"는 말대신 "해냈다"는 표현을 썼다. 준결승전 관람을 위해 조만간 한국을 방문할 예정인 친구는 "서울 상암경기장에서 붉은 티셔츠를 입고 '대한민국'을 외치고 싶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순간 같은 날 있었던 일본과 터키의 경기가 머리를 스쳤다. 공동개최국인 한국과 일본. 나란히 16강에 올랐지만 세계 최강의 이탈리아를 대적해야 하는 한국에 비해 '부담이 덜한' 터키와 맞붙은 일본의 8강 진출을 점치는 사람이 더 많았다.

같은 공동개최국인데 일본은 8강에 진출하고 한국은 16강에 머물지 모른다는 부담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몸에 밴 반일감정 때문이었을까. 일부 한국 국민은 일본과 터키전을 보며 은근히 터키를 응원했다고 한다. 한 일본 방송은 놓칠세라 "터키가 선제골을 넣자 한국인들이 만세를 불렀다"고 서울발로 보도했다.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우리 사회에 아직 남아 있는 '일본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한·일 양국의 미래지향적 관계발전은 기대하기 어려운 게 아닐까.

한국과 일본의 월드컵 공동개최에는 대회를 통해 역사적인 갈등관계를 털어버리고 진정 가까운 이웃이 되길 바란다는 두 나라의 열망이 담겨 있다.

대회를 준비하면서 '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로 한동안 한·일관계가 삐걱거리기도 했지만 일본인의 한국열풍은 뜨거웠다.

일본인들이 '쉬리'와 'JSA' 등 한국 영화에 열광하고 다쿠앙(단무지)보다 김치를 더 즐겨먹으며 우리 앞에 성큼 다가서는 동안 우리는 한·일관계를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자문해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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