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은'無言의 심판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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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현대모비스가 본텍과의 합병 의사를 내비친 지난달 30일 모비스 주가는 12% 이상 곤두박질했다. 이날 현대자동차도 3% 가까이 떨어졌다. 외국인과 기관투자가들이 이들 주식을 대거 처분했기 때문이다.

본텍은 정몽구 현대차 그룹 회장의 장남인 정의선 현대차 전무가 대주주로 있는 회사로, 현대모비스가 이 회사와의 합병을 추진해 주주 권익을 훼손하려 든다는 비난을 샀다.

결국 이런 사정을 감안한 현대차 그룹은 12일 현대모비스와 본텍의 합병 계획을 포기했다. 시장은 이에 적극적으로 화답했다. 이날 현대차 그룹 주가는 모두 올랐다. 특히 현대모비스는 3.7% 상승해 이날 종합주가지수 상승률(0.94%)을 크게 웃돌았다.

'시장의 힘'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 것이다. 이젠 대주주 등이 주주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할 경우 시장이 이를 묵과하지 않는다. 이에 따라 주주이익과 투명경영을 중시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

◇달라진 대주주=현대모비스는 이날 오전 서울 계동 현대그룹 빌딩에서 이사회를 열고 "본텍 인수안을 이사회에 아예 상정하지 않아 합병을 취소했다"고 발표했다.

모비스의 고위 관계자는 "당초 이사회에서 본텍과의 합병비율을 논의할 예정이었는데 전날 그룹 고위층 회의에서 합병을 취소키로 결정, 이사회에 안건이 올라가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합병이 계획대로 추진된다면 정 전무는 2백억원 이상의 시세차익을 얻으며 모비스의 지분을 1% 이상을 갖는 개인 2대 주주로 올라서게 될 전망이었다.

증시 전문가들은 현대차 그룹이 여론과 증시 반응을 감안해 합병을 포기한 것은 주주가치 훼손을 막기 위한 조치로 받아들이고 있다.

KTB자산운용 장인환 사장은 "재벌들은 온갖 비난을 무릅쓰면서 2세에게 지주회사 지분을 넘기곤 했다"며 "그러나 최근엔 주주들을 무서워 하기 시작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지난 4월 26일에는 제일제당 이재현 회장이 계열사인 CJ엔터테인먼트의 주가 안정과 주주 이익을 위해 보유 중이던 1천억원대의 신주인수권부 사채(BW)를 폐기처분했다. 당시 증시에서는 이 회장이 기업공개 전에 CJ엔터테인먼트 BW를 헐값에 인수해 막대한 이익을 얻으려 한다며 주식을 대거 처분했다. 그러나 이 회장이 BW를 폐기처분한다고 발표하자 CJ엔터테인먼트는 연 이틀 가격제한폭까지 올랐다.

◇냉혹한 시장=대주주들의 자세가 이처럼 바뀐 것은 무엇보다 주주들의 목소리가 커졌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온갖 연줄로 얽혀 있는 국내 기관투자가들은 재벌 그룹 대주주의 편법 증여를 제대로 막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적극적으로 주주가치를 옹호하고 나섰다. 거래소 주식 36%를 보유하고 있는 외국인 주주들은 기업 지배구조에 조그마한 변화라도 감지하면 가차 없이 주식을 팔아치운다.

실제 지난 4월 24일 LG화학이 대주주 일가에게 헐값에 넘겼던 LG석유화학 지분을 LG투자증권 지분과 맞교환 하기로 결정하자 외국인과 기관들이 LG화학은 물론 LG전자·LG텔레콤 등 LG그룹주를 일제히 처분했다.이 때문에 LG화학은 가격 제한폭까지 떨어졌다.

<그래프 참조>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되나=그동안 대주주들의 전횡과 후진적인 지배구조 등으로 인해 한국 주식은 제값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코리아 디스카운트'란 말까지 국제 자본시장에서 공공연히 사용됐다.

그러나 주주가치를 존중하는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한국의 기업 이미지도 많이 바뀌고 있다.

메릴린치 증권의 한 관계자는 "현대모비스의 본텍 합병 계획과 LG화학의 LG석유화학 지분 인수 등으로 인해 외국인은 한국 기업의 지배구조에 의혹을 품었다"며 "그러나 현대차그룹의 이번 결정으로 인해 '한국 기업이 바뀌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줄 것 같다"고 말했다.

또 KTB자산운용 장인환 사장은 "몇몇 재벌 그룹 총수들은 지분 변동과 같은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반드시 시장의 반응을 염두에 두고 의사결정을 한다"고 전했다.

이희성·김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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