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이후의 사회통합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월드컵의 감동과 흥분 속에서 지방선거일이 밝았다.6월 들어 축구 이외의 모든 일상은 정지됐지만 그래도 정해진 정치 일정은 어김없이 찾아 왔다. 월드컵을 치르는 동안 유예됐던 다른 숙제들도 이렇게 하나씩 다시 우리를 찾아 올 것이다. 월드컵이 끝나면 특히 대통령 선거 국면이 본격화하고 또 다른 열기가 우리를 감쌀 것이다. 하지만 그 열기는 월드컵의 열기와는 달리 분열과 불신을 깊게 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쯤에서 다시 한번 사회통합의 과제를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사실 오랜 군사독재 끝에 탄생한 민간정권의 우선적 과제는 사회통합작업이었다. 1980년대 후반 격렬하게 노출됐듯이 군사정부 치하의 일사불란한 사회질서에는 극심한 대립과 갈등요인이 잠재돼 있었다. 민간정부의 과제는 변화와 개혁을 통해 강제된 획일성이 아니라 자유롭고 자발적인 균형과 통합이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도록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민간정부 10년이 지나간 이후에도 우리 사회에는 지역감정을 위시한 각 집단 간의 불신과 오해가 여전히 남아 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앞으로 전개될 대통령 선거과정과 관련해 두 가지에 주목하고 싶다.

그 첫째는 두 민간 대통령의 탄생 과정이다. YS와 DJ는 자신들이 평생 동안 지켜 온 소신과 가치의 일부를 대통령이 되기 위해 양보함으로써 사회통합의 탄력을 놓치고 말았다. YS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 민주화의 동지인 DJ를 버리고 그를 탄압했던 군부정권과 타협했고 나아가 지역주의의 최대 피해자인 호남을 더욱 고립시켰다. 그 결과 지역주의와 사회적 갈등의 골은 더욱 깊게 파였고 그의 개혁 프로그램은 사사건건 DJ의 반대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DJ 역시 대통령이 되기 위해 진보적인 자신의 노선과 정반대에 있는 JP와 손을 잡고 그 대신 범 민주화 세력인 YS와 완전히 결별했다. 그 결과는 JP와의 갈등에 따른 혼선과 무리, 그리고 개혁정책에 대한 충분한 지지 확보 실패로 나타났다. 물론 당시 그들의 선택에 불가피한 정황이 있었음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87년의 후보 단일화 실패 이후 두 사람의 지나친 경쟁의식과 대통령 당선에 대한 집착이 결국 민주화와 절실한 사회통합을 지연시켰다는 아쉬움은 크다.

정치에서의 타협은 불가피하지만 거기에도 한계는 분명히 그어져야 한다. 다수결 원칙이 적용되는 민주정치에서 다수를 확보하는 것은 중요하나 그렇다고 자신의 정치적 신념이나 정직성을 양보하거나 타협해서는 안 되고 나아가 사회적 분열을 뻔히 예상하면서 타협하는 일이 용납돼서는 안 된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도 앞으로 정치 세력 간에 수많은 이합집산이 일어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후보들이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얻는가를 주시해야 하며 어떠한 타협과 양보를 해서라도 반드시 대통령이 되겠다는 후보를 특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런 후보는 일견 다양한 세력을 포용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오히려 집권 후의 정책추진에 혼선이 생기고 사회 통합이 지연되리라 보는 게 틀림없을 것이다.

그 둘째는 사회통합을 위한 식자(識者)들의 역할이다. 아직 우리의 정치적 역량은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기보다 때로는 갈등과 분열을 오히려 확산시키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는 정치의 공백을 메워줄 수 있는 식자들의 실천적 역할이 매우 중요하나 대부분의 식자들은 정치의 미숙을 한탄하고 비난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한계를 긋고 있다.

나아가 말로는 사회통합을 얘기하지만 실제 행동에서는 오히려 지연이나 학연 등 패거리를 존중하는 이른바 명문(名門) 출신의 식자들이 우리 사회에는 허다하다. 가장 아쉬운 것은, 민간정부가 출범한 다음에도 대부분의 식자들이 자기 입장을 새롭게 정립하려는 수고 없이 과거대로 반 정부적 입장에 손쉽게 합류했다는 점이다. 식자들의 이러한 태도가 민간정부의 존립기반이나 개혁작업을 크게 약화시킨 것은 사실이고, 궁극적으로는 군사정권과의 차별화에 실패하도록 만든 중요한 원인이 됐다고 생각한다.

만일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특정 지역이나 출신학교의 역할이 다시 중요해지고 반목과 불신이 증폭되는 일이 벌어진다면 우리 사회는 여지없이 배운 자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