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核무장 뜸들이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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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세계평화와 인류 상생(相生)을 염원하는 축제이기도 한 2002 한·일 월드컵이 개막되던 날, 서울 상암구장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는 평화의 메시지를 세계에 선포했다. 바로 그날 도쿄(東京)의 그의 관저에서는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관방장관이 '일본도 핵무기를 보유할 수 있다'는 의지를 내외에 천명했다. 왜 하필이면 월드컵 개막식 날에 핵무장 의지를 천명했을까.

더욱이 올해는 일·중 국교정상화 30주년이고, 핵 보유국인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 전운이 감돌고 있지 않은가. 우연일까. 우연이라기에는 발언의 계기와 내용이 매우 조직적이고 계산된 것으로 보인다.

후쿠다 장관의 표현에 의하면 일본의 핵무기 보유 문제는 "헌법상 법 이론적으로 보유해서는 안된다고 쓰여 있는 것이 아니라… 정책판단으로 보유하지 않기로 한 것일 뿐이며, 지금은 헌법까지 개정하자는 이야기가 나오는 시대가 됐으므로… 국민이 '핵무기를 가져야 한다'고 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요컨대 핵무기를 갖고 싶고 가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내외로부터 비판과 우려가 쏟아지자 고이즈미 총리는 물론 후쿠다 장관 본인도 "현 정권에서 비핵3원칙을 바꿀 생각은 없다"고 한발 물러섰다.

필자는 이미 본란을 통해 일본의 보수·주류가 현재 추구하고 있는 목표는 '전쟁이 가능한 일본'에 있으며,그 다음의 국가진로 목표는 '핵 무장한 일본'일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그 위험성을 경고한 바 있다(4월 25일자 '중앙시평'). 후쿠다 장관의 이번 발언은 필자의 우려가 망상이나 기우(杞憂)가 아님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우려가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현실화할 수 있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후쿠다 장관의 이번 발언은 그만의 돌출 발언이 아니다. "헌법상 원자폭탄(의 보유)도 문제될 것이 없다"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관방부장관의 와세다대학에서의 강연에 대한 지원사격이었다. 핵무장에 관한 일본 정부의 의지와 욕망이 결코 한두 사람의 돈키호테적 발상의 산물이거나 이른바 '망언'이 아니라 일본 보수·주류의 본심이자 집단적 정책의지임을 나타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베 신조와 후쿠다 야스오가 누구인가.기시·사토·후쿠다 전 총리들과 아베 신타로 전 자민당 간사장의 혈연이자 정치적 후예가 아닌가. 그들 주장의 정치적 위상은 무엇인가. 패전 후 미국이 설정해 놓은 금기(禁忌)를 뚫고 '핵무장이 가능한 일본'의 건설을 국가이성으로 설정하고, 그 실현에 정치인으로서의 존재가치를 부여했던 보수의 살아 있는 정신적 대부 나카소네 전 총리의 정치적 맥을 잇는 것이 아닌가.

비핵3원칙은 헌법 제9조와 더불어 '평화국가 일본'의 이미지 형성에 크게 기여해 왔다. 사토 총리는 그 공로로 노벨 평화상까지 받았다. 그러나 이 '영광'의 비핵3원칙도 한 꺼풀 벗겨보면 허점투성이였다. 무엇보다 그것은 핵을 적재한 미국 군함의 일본 기항(寄港)을 저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원자력 발전소의 핵연료 재처리 과정에 플루토늄을 과잉 확보하고 있는 것도 문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이 취해야 할 바람직한 조치는 구멍 뚫린 비핵3원칙을 법제화해 그 본연의 기능을 강화하는 일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지금 거꾸로 가고 있다. 야당 당수와 정부 수뇌가 잇따라 핵무장 가능성에 관해 '치고 빠지기'를 되풀이하는 것은 아마도 핵무장의 뜸들이기를 하면서 일본 국민과 주변국에는 '면역'을 기르려는 계산된 행동일 것이다.

중국도 이미 핵 대국이고 북한마저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고 있는 마당에 일본이 핵무장의 충동에 사로잡히는 것도 이해는 간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시대착오적 충동이다. 일본이 노골적으로 핵무장의 길로 나설 때 동북아시아의 군비경쟁이 걷잡을 수 없이 격화되고 갈등이 심화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일본의 국리민복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도 자명해 보인다. 바야흐로 러시아도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회원국이 돼 집단안보를 추구해 나가는 지역공동체 시대가 아닌가. 일본의 핵무장은 그렇지않아도 지역 공동체 형성에 뒤처진 동북아를 세계사의 흐름에서 더욱 낙오시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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