女요리사들 입 빌려'남성권력'비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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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금기를 깨는 작가로 평가받는 귄터 그라스는 『양철북』 발표 이후 『넙치』(1977)로 국제적 명성을 확고히 했다.

『넙치』는 식량과 여성 문제를 중심으로 인류 문화사를 조망하면서 남성중심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소설이다.

소설은 화자인 '나'를 4천여 년을 살아온 인물로 설정하면서 환상적이고 동화적인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다. '나'는 선사시대부터 철기, 중세, 바로크, 절대 왕정기, 19~20세기 혁명기, 제3제국, 현대에 이르기까지 만났던 열 한명의 여자 요리사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소설의 또 다른 축은 4천년간 살아오며 남성을 역사의 주축으로 만든 '말하는 넙치'가 차지한다. 넙치는 남자들에게 지식과 권력을 주었으나 결국 역사는 전쟁과 기아로 치달았을 뿐이라며, 여성을 역사의 중심에 세우기 위해 여자들의 낚싯대에 걸려든다. 그러나 넙치를 잡은 세 여자는 넙치를 여성 배심 법정에 넘겨 신석기 시대 이래 남성의 편에만 서 있었던 그의 죄과를 묻는다.

책 첫 장에 나오는 '헬레네 그라스에게'의 헬레네는 저자의 딸인데, 그라스는 헬레네가 잉태된 73년에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살아가야하는 딸을 위해 들려주는 이야기를 의미하기도 한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화가이기도 한 그라스는 책 표지를 포함, 넙치와 관련된 삽화를 직접 그렸다. 요리를 근간으로 한 소설 내용도 작가 자신이 요리에 일가견이 있는 점과 상통한다.

우상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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