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cover story] 늘 떠나 있던 당신이 그땐 미웠습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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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성탄절이 다가오니 제가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군 입대를 앞두고 있던 1991년 겨울이 떠오릅니다. 그날도 크리스마스 이브였죠. 기억나세요? 아버지께서는 일정이 바뀌어 부산항에 잠시 머문다고 하시면서 당신의 배를 구경시켜주시겠다고 하셨죠. 저는 싫었지만 어머니 고집을 꺾을 수 없어 동생과 함께 갔지요. 배 앞에서 어색한 표정으로 우리 형제를 맞이한 당신은 우리를 식당으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러고는 급한 일이 있다며 뛰어나가셨지요. 저는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싫다는 걸 억지로 끌고 와서 식당에만 앉혀두다니요.

저는 선장이신 아버지가 싫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떨어져 지낸 시간이 더 많아 이웃집 아저씨나 다름없었죠. 그때까지 당신께 성적표를 보여드린 적도 없고 진학 문제로 상의해본 적도 없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반항심 때문일까. 당신이 모처럼 집에 오시는 날은 전 집 밖으로 돌곤 했죠.

당신이 시켜주신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있는데 항해사 아저씨가 달려와 아버지가 다쳤다고 말했습니다. 갑판으로 나가보니 거대한 크리스마스 트리와 함께 당신이 서 계셨습니다. 팔에서 피가 솟고 있었지요. 저는 신경질을 부리면서 집에 가겠다고 했지요.

그때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트리 꼭대기에 '송별 군 입대'와 제 이름이 쓰인 팻말이 걸려 있었습니다. 저는 아무 말도 못하고 펑펑 눈물만 쏟았지요. "조금만 더 하면 완성할 수 있었는데…"라고 당신은 오히려 미안해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배 앞에서 저희를 배웅하며 "군에 잘 갔다 오라"고 말하셨습니다. 그날 저는 20여년 동안 쌓아온 당신에 대한 미움을 깨끗하게 씻었습니다. 하지만 그 후로도 제 마음을 당신께 털어놓은 적이 한 번도 없는 것 같군요. 아마도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당신을 닮은 탓인 모양입니다. 그래도 올해 크리스마스엔 쑥스러움을 털어내고 말해보렵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 명우 올림

※강명우(36)씨는 현재 건축설계사로 일하고 있으며 그의 아버지는 8년 전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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