半島의 낙관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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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중화 대륙이 권위주의와 사회주의 담장 안에다 시장경제를 가꾸어 온 지는 약 20년이다. 한반도의 북쪽은 이 소식을 외면하고 있다. 남쪽에서는 거꾸로 김대중 정권이 지난 4년 동안 시장경제 속에 사회주의를 실험해 왔다. 개혁이란 말은 중국에서는 시장경제 실험이고 남한에서는 사회주의화를 뜻한다. 중국은 유산인 권위주의를 지금도 보존하고 있다. 남한의 권위주의는 적어도 무늬만은 민주주의로 바뀌었다.

빈부差 심화 진짜 이유는

'가진 자가 고통을 받도록 하겠다'는 사회주의 노선을 남한에서 처음 언명하고 나선 대통령은 김영삼씨였다. 그 스스로는 이 선언이 전형적인 사회주의적 권위주의 노선과 동일한 것임을 몰랐을 수 있다. 그의 목표는 평등을 주장하는 유권자를 포섭하는 것, 즉 단순한 인기 차원의 책략이었을 수 있다.

김영삼씨를 계승한 김대중씨는 적어도 사회주의에는 '준비된' 대통령이었다고 보인다. 그의 오래 된 대중경제론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의 임기 동안에 빈부격차가 더 악화됐다는 통계적 실증을 가지고 그가 사회주의자가 아니라는 물증으로 삼으려는 일부 지식인의 논리는 궤변이다.

이 기간에 빈부격차가 심화된 까닭은 많은 중산층이 실업자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1997년의 외환위기 때문에 기업의 생산과 투자활동이 위축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사회주의가 내거는 평등 추구 정책으로도 이런 실업을 모면하거나 극복할 방책이 없다는 것만 오히려 증명됐을 뿐이다.

만일 김대중 대통령이 보다 시장적 방법으로 외환위기 해결에 접근했더라면 고용은 더 빨리 회복되고 빈부격차가 악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빈부격차 악화 원인의 상당 부분은 그가 사회주의자가 아니었음에 있지 않고 반대로 시장주의자가 아니었음에 있다.

지금까지는 중국의 시장경제 실험은 성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권위주의의 자리에 민주주의가 들어 앉지 않는 한, 그리고 사회주의 대신 시장경제가 주인이 되지 않는 한 이 성공에는 한계가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반대로 남한의 사회주의 실험은 도입하자마자 실패하고 있다. 개혁은 부패만 확대시켰다. 사회주의 실험의 더 큰 해악은 기업가의 투자 의욕을 급격하게 무너뜨리는 데 있다. 다음 5년 간의 대통령도 사회주의를 실험하는 사람을 뽑았다가는 한국 경제가 20년을 후퇴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한반도는 대륙과 연결되는 곳은 한 면뿐이고, 나머지 세 면은 해양으로 열려 있다. 한국은 마땅히 대륙과 해양 사이에서 균형을 추구하며 살아가되 그 비율은 1대 3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국은 경제·군사·문화적으로 막강한 중력(重力)을 가졌던 중국에만 완전히 편중된 역사를 수천년 살아 왔다.

19세기 중국이 해양 세력에 의해 침략받아 상대적으로 약화되자 한국은 강제로 중국에서 분리돼 해양세력화 한 일본에 합병됐다. 해방과 함께 생긴 남북 분단은 그 시작은 미·소 냉전 때문이었으나, 미·소 냉전이 끝난 현재는 북한의 대륙(사회주의·권위주의)세력과 남한의 해양(시장경제·민주주의)세력 사이의 새로운 대립이 분단을 계속시키고 있다.

중요한 사실 하나는 해양 세력은 대륙을 미워하지 않으나 대륙 세력은 해양을 미워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북한은 냉전이 끝난 지금도 언필칭 남한을 '해방'시키겠다고 말한다. 남한에서는 '북진통일'이란 말이 사라진 지 오래인데도 말이다. 이렇듯 북한이 남한의 국방상 주적(主敵)인 까닭은 남한으로서는 순전히 수동적인 이유에서다.

대륙 추종 실험 실패 뻔해

중국의 시장경제 실험은 중국 대륙을 해양화해 보려는 자발적인 노력이란 점에서 위대하다. 우여곡절은 많이 겪게 되겠지만 중국 자체가 언젠가는 결국 대륙적 권위주의를 버리고 해양적 민주주의로 변화할 수도 있다. 중국 역사상 언제나 권위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대안으로 있어 온 노장(莊)사상은 유럽 발(發) 그 어떤 사상보다 민주적이고 자유시장적이란 점을 주목할 만하다.

중국의 변화와는 관계없이 남한은 이미 바다 바람을 마음껏 즐기고 있는 해양국가다. 남한 사람들은 부자연스럽고 불안한 사회주의 실험을 그 명백한 실패 때문에 조만간 끝낼 것이다. 북한인들 대륙 추종의 그 극단적 실패를 얼마나 더 오래 참을 수 있으랴. 이것이 새삼스럽게 되뇌는 한반도의 낙관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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