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대중문화 한바탕 섞어 이야기 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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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서양 근대 소설의 고전으로 꼽히는 로런스 스턴의 『트리스트럼 샌디』는 한 8백여쪽에 걸쳐 온갖 허황된 장광설과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거짓 이야기를 쏟아놓은 뒤 끝 부분에서 이렇게 너스레를 떤다.

"아이고,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이야기랍니까?"

"수탉과 황소 이야기지요."

즉 앞뒤가 전혀 들어맞지 않는 황당무계한 이야기였다는 것이다. 에코의 신작 소설인 『바우돌리노』에서도 '중세 최대의 거짓말쟁이'인 바우돌리노는 마치 소 닭 쳐다보듯이 얼핏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온갖 풍(風)과 설(說)을 뒤섞어 한바탕 이야기의 난장을 펼친다. 그런 다음 끝에 가서는 천연덕스럽게 이 믿거나 말거나 박물지(博物誌)에 역사가는 현혹되어서는 안된다고 충고한다.

시골뜨기 소년의 여행기

그러고나서는 '곧 바우돌리보다도 더한 거짓말쟁이'가 이야기를 소설로 들려줄테니 잠깐만 기다려달라고 능청을 떤다. 그래서 우리도 이렇게 되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아이고, 작가 양반, 대체 이게 다 무슨 이야기란 말입니까?"

굳이 이 소설을 축구에 비유하자면 후반 종료 1분전에 역전과 재역전, 다시 재역전이 숨가쁘게 이어져 어안이 벙벙한 동시에 무릎을 치게 만드는 걸작이라고 말하고 싶다.

동시에 이러한 극적 반전이 연속되기 전까지는 계속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이야기란 말인가'라는 의문을 떨치기 어렵다.

하지만 그런 투정에 대해 에코는 이 글의 청자인 니케타스의 입을 빌려 이렇게 의뭉을 떤다. 바우돌리노는 희대의 거짓말쟁이, 구라쟁이, 뻥쟁이고 이 이야기 또한 전부 거짓말이니 그리 심각하게 생각할 것은 없다고.

실제로 겉 구조만 보면 이 소설은 한 시골뜨기 소년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에게 '예언을 전해주어' 황제의 양아들이 되는 이야기부터 시작해 동방의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요한 사제의 왕국으로 성배를 드리러 떠나는 여행기 형식을 취하고 있다.

에코 특유의 지적 유희

그런데 에코의 장점은 주제나 콘텐츠 자체보다는 아무래도 이야기를 버무리는 솜씨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도 사실과 허구, 전설·학설·신화와 대중 문화를 버무려 맛깔진 비빔밥으로 만들어내는 에코 특유의 현란한 솜씨는 여전하다.

예를 들어 중세 최대의 유토피아적 꿈이었던 요한 사제의 왕국에 대한 탐험은 '인디애나 존스' 류의 할리우드식 모험과 뒤범벅된다.

그리고 맨 마지막의 지하 납골당 묘지 장면에서 세 명의 친구를 대상으로 살인범을 가리는 대목은 세 명의 죄수 중 누가 감옥을 빠져나올 수 있는가와 같은 라캉적 궤변과 교묘하게 뒤얽혀 있기도 하다. 이처럼 고급스런 지적 유희와 대중성, 머리의 진지함과 배꼽의 웃음이 하나로 퓨전되어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 『바우돌리노』를 비롯해 에코의 소설들을 읽을 수 있는 기본 코드는 무엇일까? 그에 대한 해답은 아무래도 저자의 발언에서 찾는 것이 가장 빨라 보인다.

에코는 어딘가에서 "중세인들은 세계를 텍스트로 읽는 오류를 범했고 현대인들은 텍스트를 세계로 읽는 오류를 범했다"고 말하고 있다. 당연히 이 명제는 에코 기호학의 핵심을 구성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기호학은 세계와 역사를 지워버리는 경향을 갖는 구조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과 계속 불편한 관계를 맺어올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이 명제는 에코의 여러 소설을 관류하는 기본 패러다임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장미의 이름』을 세계를 텍스트로 읽는 호르헤 수도사와 텍스트를 세계 속으로 풀어놓으려는 윌리엄 수도사 간의 대결로 읽으면 어떨까? 이를 통해 그는 현실과 세계를 동시에 비판하고 있다. 그래서 당연히 진리를 상징하는 '장미의 이름'은 호르헤의 주장대로 웃음을 잃은 엄숙한 텍스트가 아니라 굶주림에 지쳐 수도원의 쓰레기통을 뒤지는 시골 소녀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과 텍스트가 전부 거짓말이라고? 그러면 진리는? 에코는 『장미의 이름』에서는 수도원을 불태움으로써 진리를 참칭해온 모든 이데올로기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던진 바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은 놀랍다. 그는, 내가 보기에는, 그러한 진리가 사랑과 믿음과 소망이라고 말하는 것 같으니 말이다. 다 늙은 바우돌리노가 요한 사제의 왕국과 인생에 한번뿐인 사랑을 향해 다시 여행을 떠나는 마지막 장면은 아무래도 그렇게 읽힌다.

그래도 유토피아는 있다

나는 처음에 에코가 고향의 성인과 같은 이름을 가진 소설을 발표한다고 했을 때 '에코도 이제는 다 늙었군'이라고 지레짐작했다.

유토피아와 진리에 대한 갈망이 거의 완전히 사라진 우리 시대에 그도 이제는 할 수 없군 했다.

하지만 그는 유토피아를 찾아, 사랑을 구해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그리하여 『장미의 이름』의 도저한 회의주의와 결별하고, 다시 함께 다른 세상에 대한 꿈을 꾸라고 은근히 부추기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래도 에코는 여전히 에코다. 스턴은 자기 소설이 '이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 한편'이라고 하지만 에코는 자기는 바우돌리노보다 더한 거짓말쟁이라고 하니 말이다. 그러니 "독자 여러분,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이야기랍니까?"

조형준

<문학평론가·『세계의 문학』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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