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戰'이란 이름의 추악한 전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6면

역사소설 장르에도 다양한 면모가 보인다. 특히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은 여러 면에서 그러하다. 대부분의 역사소설은 한 사람 또는 한 집안이 주인공이지만 이 책에는 그것조차 도외시돼 있다. 전체가 6부 14장으로 구성돼 있는데, 각 부는 물론 심지어 각 장마다 주인공 격의 인물이 한 두명, 또는 여러명 새로 등장한다. 하기야 약 3백년(1096~1291)에 걸친 서유럽 기독교권과 중동 이슬람권의 무력 충돌을 사실화하고 있는 상황을 염두에 두면 이해못할 것도 없다.

또한 이 책을 역사소설이라 규정짓기도 어렵다. 부록으로 용어 설명, 주석·연표·지도·색인까지 첨부돼 학술서를 방불케 하지만 꼭 그렇게 단정할 수도 없다. 평자의 눈에 비친 이 책은 역사소설과 학술서적의 중간 형태다.

이런 특이성은 저자 이력에서 나타난다. 그 자신이 소설가이면서 역사학자, 그리고 저널리스트다. 1949년 레바논 태생의 그는 베이루트대학에서 정치경제학과 사회학을 전공한 후 76년 프랑스로 이주했다. 아랍역사와 문화 및 의식세계를 사실적인 문체와 신비로운 분위기로 그려 프랑스 문단의 인정을 받았으며 93년에는 '타니오스의 바위'로 콩쿠르상을 수상했다. 칼릴 지브란 이후 레바논이 배출한 세계적 작가의 대열에 올라 있는 인물이다.

이 책의 내용은 주로 예루살렘 탈환을 목적으로 한 십자군의 '성전(聖戰)'에 얽힌 살인만행을 피해자인 아랍측 사료를 토대로 엮어 놓은 것이다. 그러나 제목만 보고 유럽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보여주거나 이슬람측을 전적으로 옹호하려는 작품으로 판단해선 안된다. 오히려 아랍 내부의 모순과 결함에 대해서도 적나라하게 지적한다.

십자군 전쟁은 당시 시대적 상황과 안목, 특히 종교적 분위기를 통해 이해하는 것이 합당하다. 마치 오늘날의 초강국 정치 지도자들이 입을 열 때마다 세계평화와 인류의 복지 실현을 내뱉듯이 당시의 지도자들은 종교를 빙자했다. 그런데 침략자의 지도자격인 로마 교황이 성지 순례와 탈환을 내세워 귀족과 평민을 동원했듯이, 방어자인 아랍인들도 종교와 이슬람 영역의 방어라는 미명을 걸었다. 그 뒤에는 단순히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간의 전쟁뿐만 아니라 기독교도간, 또는 이슬람교도간의 갈등, 권모술수 등이 난무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적과 동지 구분조차 어렵다.

번역문은 대체로 정확하고 수려하다. 때때로 이슬람 용어가 생소한 탓인지 '수피사상'(soufisme, 이슬람 신비주의, 1백29쪽)을 수피교로 오역했고 '바티니'(원뜻은 코란의 속뜻을 아는 사람, 즉 이슬람의 이스마일파, 1백63쪽)는 설명 없이 그냥 지나쳤다. 그러나 이러한 흠집은 옥 속의 티에 불과하다. 다만 여기서 엿볼 수 있는 것은 프랑스 독서계의 이슬람 지식이 한국보다 더 깊다는 점이다. 아마도 이는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1천년 이상 대립한 중동 이슬람과 기독교 유럽의 대립에서 연유했을 것이다.

김정위<한국외국어대 교수·이란어>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