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은 내 인생의 동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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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0면

1992년 미국 보스턴. 보스턴 대학 신입생인 한 한국 유학생이 '니만 마커스'백화점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은 그 또래 남학생들이 관심을 기울일 만한 스포츠용품이나 캐주얼 의류 매장이 아니라 인형 가게였다.

복스럽게 살이 오른 통통한 볼과 풍부한 표정을 담은 커다란 눈동자, 귀티나는 얼굴과 잘 어울리는 화려한 레이스 드레스….

그는 첫눈에 빅토리아 시대 백작 부인에 반해버리고 말았다. '마담 알렉산더'인형과 사랑에 빠진 것이었다.

그리고 9년 뒤. 뉴욕의 인형회사 '마담 알렉산더'본사. '보스턴 컨설팅'의 컨설턴트가 된 이 유학생이 '마담 알렉산더'국제 담당 이사와 악수를 나눴다. 8개월 동안의 협상 끝에 드디어 이 인형의 한국 수입권을 따내는 순간이었다.

그동안 본사에 제출한 보고서만도 3백 페이지가 넘는다. 전통을 중시하는 '마담 알렉산더'는 돈벌이보다 인형에 대한 애정과 지식을 중시했기 때문에 수입권을 따내는 과정은 인형 사랑에 대한 테스트와도 같았다.

이 유학생이 바로 '마담 알렉산더 코리아'대표 차상원(30)씨다.

국내에 소개되면서 '1천만원짜리 인형'으로 화제를 일으켰던 '마담 알렉산더'는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러시아 이주민 출신 비트리스 알렉산더가 23년 탄생시킨 인형 브랜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수공으로 만들어진다.

서울 삼성동의 한적한 주택가에 위치한 '마담 알렉산더 코리아'사무실 책상 위에는 초등학교 여자 아이들이 가지고 놀 것 같은 인형놀이 세트가 놓여있다.

"인형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런 저런 사업 구상이 떠오르지요."

차대표는 변명하듯 멋적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보스턴 대학과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던 시절에는 친구들에게도 자신이 인형을 모은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젊은 남자가 인형을 수집한다고 하면 좀 이상하게 생각하기도 해 아예 말을 안했다고.

"집에 놀러온 사람들이 '무슨 인형이 이렇게 많느냐'고 물으면 그냥 여자 친구 주려고 산 것들이라고 둘러댔죠."

유학 시절, 그가 사모은 마담 알렉산더 인형 1백여개는 혼자 살던 좁은 아파트를 가득 채웠다.

한 개당 수백달러를 주어야 살 수 있는 고가의 인형이었기에 몇달씩 용돈을 아끼고, 카페테리아 등에서 아르바이트 한 돈을 모아야 했다.

"처음엔 그저 예뻐서 샀어요. 하지만 보면 볼수록 빠져들더군요. 알 수 없는 매력이 절 사로잡았죠."

생산이 중단돼 구하기 힘든 인형의 경우 개인 소장자를 찾아내 멀리까지 달려가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가 가장 아낀다는 '대통령 영부인 시리즈'도 그렇게 해서 모은 인형들이다. 케네디 대통령의 부인 재클린 여사 인형은 6시간이나 차를 몰고 가서 구해왔다.

'인형 매니어'였던 그가 '인형 사업가'가 되기로 결심한 건 99년. 컨설팅 업무차 한국에 왔다가 재미삼아 마담 알렉산더 인형에 대한 시장 조사를 해본 것이 계기였다. 한국에서도 충분히 수익을 낼 수 있다는 뜻밖의 결과가 나왔다.

"안정된 삶을 사는 것도 좋지만 정말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보자는 용기가 생기더군요. 공부도 제가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생각해요. 부모님도 처음엔 만류하셨지만 이젠 제가 정말 진지하다는 걸 알고 인정해 주세요."

사업에 착수한지 2년 만인 지난 2월, 서울 압구정동 현대백화점에 '마담 알렉산더'1호점이 문을 열었다. 이제 막 첫걸음을 뗀 만큼 당분간은 마담 알렉산더 인형을 널리 소개하는 데 주력할 계획이다. 가격은 30만원에서 1백만원대가 주류다.

그는 마담 알렉산더에서 제작하는 여섯살난 여자 아이 캐릭터 '엘로이즈'에도 각별한 애정이 있다고 했다.

'엘로이즈'의 경우 인형뿐 아니라 팬시·가구 등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해 캐릭터 사업을 해 볼 생각이라고 한다.

"언젠가는 인형 박물관을 만들고 싶어요. 단순한 장난감을 넘어서 '예술품으로서의 가치가 있는 인형'을 여러 사람들이 보고 즐길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죠."

인터뷰 내내 인형 얘기만 나오면 두 눈을 반짝이며 열정을 담아 설명하던 차씨.

"지금은 여자 친구가 없다"는 그는 인형과의 달콤한 사랑에 푹 빠져있는 것처럼 보였다.

김현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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