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봄날은 간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6년 전 봄날도 이렇게 가고 있었다. YS정권 4년차인 1996년 4월, 청와대 부속실장 장학로의 비리사건이 터졌다. 그 이듬해 봄 한보사건으로 몸통·깃털론을 읊조리면서 청와대 홍인길 수석이, 뒤이어 대통령 아들 현철씨가 구속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터졌다.

장학로 사건이 터졌을 때 이런 사건이 다음 정권에서도 계속될 수 있다는 개연성을 이 칼럼에서 적은 바가 있다. 군사정권에 항거한 민주화세력이 정권에 참여할 경우, 불가피하게 권력의 사물화(私物化)현상이 생길 수 있고 그것이 패거리정치와 측근·가신정치로 연결되면서 가신의 부패와 친인척 비리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20년 넘게 감옥과 생사를 넘나들면서 의리와 의협심으로 뭉친 이들 의협집단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논공행상(功行賞)에 따라 권력핵심에 배치되고, 물과 권력은 흐름이 막히면 부패하게 마련이어서 그 첫조짐이 장학로 사건으로 터졌다고 보았다.

끝이 없는 권력의 私物化

중국 최대의 국가를 세운 한(漢)고조 유방(邦)이 전국의 유랑 의협집단을 모아 정권을 창출했을 때도 유사한 현상이 일어났다. 권력실세들이 한자리에 모여 파티도 열고 술도 마시며 지난날의 무용담과 공로다툼을 하다간 칼을 뽑기도 하고 황제 유방을 잡고 형님 하며 하소연하는 자도 나타났다. 보다 못한 유생 숙손통(叔孫通)이 황제에게 권한다. 사적인 군신관계를 공적관계로 바꾸고 인치 아닌 법치·제도치로 기강을 잡아야 한다고 진언한다. 그래서 한신(韓信)과 소하(簫何)같은 측근이 차례로 제거된다. 정권이 투쟁의 전리품이 되고 구시대적 의협집단이 정권투쟁의 핵심으로 상존하는 한 우리의 민주정치는 덧없는 봄날처럼 속절없이 흘러갈 뿐이라고 예측했다.(본지 96년 4월 24일자 '봄날은 간다')

정말 유감스럽게도 그때의 예측이 어긋나지 않고 있다. DJ정권인수팀 5인방이었다는 자가 권력실세에서 밀려나자 대통령 아들에게 접근해 온갖 이권에 개입한 흔적이 드러나고 있다. 대통령 아들의 비리 의혹이 연이어 보도되자 이를 막고 해명하는 자들이 모두 DJ를 몇년씩 그림자처럼 따랐던 측근들이었다. 평생을 DJ 수발에 몸바쳤다는 사람은 아태재단 간부로 있으면서 또다른 아들의 게이트 연루 혐의로 구속됐다.공적 장치인 국정원 간부들이 이들 측근과 어울린 사건이 연이어 터지고 법의 마지막 보루인 검찰이 이들 측근 실세에게 정보를 제공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친인척 비리를 막아야 할 경찰이 한통속이 돼 이권에 개입하고 미국으로 튀는가 하면 이를 정부가 방조했다는 의혹마저 일고 있다. 권력의 사물화, 공적관계와 사적관계가 혼동되는 권력남용, 권력의 동맥경화 현상을 우리는 지금 두 정권에 걸쳐 보고있는 것이다.

패거리 정치, 지역정치, 개혁과 바람의 정치로 특징지워지는 3김(金)식 정치의 파행과 파탄을 두차례 겪으면서도 우리가 아무런 교훈을 얻어내지 못하고 뼈저린 반성을 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진정한 민주정치란 없다는 절망을 해야 한다. 이런 절망을 다시는 맛보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몇가지 사실을 다짐해야 한다.

첫째, 상식과 합리가 통하는 권력구조를 만들어 내는 데 우리 모두가 적극 동참해야 한다. 제왕적 대통령이 아닌 경영자적 대통령을 선택하기 위해 그들의 말과 행동과 정책을 철저하게 검증해야 한다. 왜 제왕적 대통령이 나오는가. 사적인 관계로 형성되는 패거리집단이 지역정서를 자극하면서 정권을 투쟁의 전리품으로 착각하는 1인통치구조를 만들어 권력을 사물화하는 두차례 경험을 목격했다면 그 답은 자연스레 나온다.

선동적 개혁 반성해야

둘째, 개혁과 변화의 바람이라는 구호적 선동에 놀아나지 말자는 것이다. YS집권 초기 개혁 바람은 거셌다. 그러나 바람이 지나간 자리엔 아들의 국정 농단과 국가 부도 위기라는 폐허만 남았다. DJ정권 내내 재벌·교육·의료·언론개혁이라는 바람이 광풍처럼 휘몰아쳤다. 무엇이 남았는가. 언론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생사람만 잡고 교육·의료개혁은 손대지 않은 것만 못한 지리멸렬의 혼란만 가중시켰다.

개혁하지 말고 변화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개혁과 변화를 순리와 이성, 글로벌 잣대에 따라 합리적으로 하자는 것이다. 법치의 정상화다. 돌풍처럼 광풍처럼 기존질서를 뭉개면서 결국은 패거리의 권력 나눠먹기를 위해 얼렁뚱땅 해치우는 광풍개혁이 아니라 봄바람처럼 알게 모르게 바꿀 것은 바꾸고 고칠 것은 고치는 그런 개혁과 변화를 유도할 경영자 정치구조를 만들어내자는 것이다. 제발 이런 봄타령을 5년 후에는 다시 하지 말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