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체적 실패' 국민 등 돌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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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집권 4년 만에 중도하차한 것은 그의 급진 사회주의 정책에 국내 정치와 경제를 장악해 온 석유재벌 등 기득권층은 물론 노동계마저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좌익계 민족주의자를 자처하며 국민의 80%를 차지하는 빈민층의 압도적인 지지 속에 당선했지만 경제 위기 등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집권한 동안 한 일이 없다"는 비난을 들었다.

◇급진 개혁에 재계·군부 등 돌려=차베스는 1998년 12월 대선에서 고위층 부패 척결과 경제 개혁 등 급진 포퓰리즘(민중주의) 노선을 내세워 압승했다. 또 6년 연임으로 헌법을 개정한 뒤 치른 2000년 6월 선거에서도 60%의 지지로 재선에 성공했고 지난해는 토지·세제 개혁 등을 신속히 처리할 수 있는 비상대권을 위임받는 등 한때 국민의 지지를 얻었다.

하지만 세계 4위의 석유 수출국이면서도 지난해 국제 석유 수요 감소로 유가가 떨어지며 재정 적자가 확대되고 환율이 폭락하면서 경제 위기를 맞자 국민이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거기에 최대 기업인 국영석유회사(PDVSA)에 자신의 측근 군부 인사와 현역 장교를 배치하고 정부 주도 사회 개혁 운동인 '볼리바르 200'에 군을 대거 동원,"군을 사병화(私兵化)하고 군 부패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비난을 본격적으로 듣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에서 연정이 붕괴되는 조짐을 보이고, 지지도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면서 군부가 태도를 바꾸기 시작, 급기야 지난 2월부터는 현역 장교들의 '대통령 하야' 요구가 공개적으로 나오고 퇴진 운동이 본격화했다.

나아가 지난달 의회를 통과한 민간 석유 사업의 국유화를 규정한 석유사업법과 사유 재산인 토지를 국가가 압류할 수 있도록 한 토지개혁법 등 49개 급진 개혁 법안은 그동안 '속만 끓이던' 기득권 세력에 본격적인 반발의 구실을 주었으며 노동계도 "정부의 경제 개입으로 외국인 투자자가 떠나고 고용 불안이 심해진다"며 반발했다.

결국 좌파적 개혁에 대한 기득권 세력의 반발과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노동계의 지지 상실로 집권 토대를 잃은 차베스는 군부의 마지막 일격으로 무너지게 된 것이다.

◇향후 전망=차베스 대통령의 퇴진으로 베네수엘라 정권은 일단 군부와 재계 연합의 과도정부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군부는 차베스의 사임 발표 직후 "국가는 임시정부의 통제 하에 질서가 지켜지고 있다"며 정권 장악을 기정사실화했다.

그런 가운데 페드로 카르모나(60)베네수엘라 상공인연합회장이 과도정부의 수반이 된 것은 군부가 일단 재계에 양보한 것으로 보인다. 군부가 직접 정권을 장악하면 '차베스 대통령이 군부 독재를 꾀한다'고 반발했던 재계·노동계의 반발이 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부-재계 연합 과도정부가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차베스 퇴진의 한 축이었던 노동계가 "참여 기회가 박탈됐다"며 반발할 가능성도 크고 야당이 즉각적인 선거를 요구해 정국 불안은 계속될 전망이다. 특히 포스트 차베스를 두고 군부와 야당 등 정파 간 갈등이 커질 것이란 점도 정국 전망을 흐리게 만드는 요소라고 현지 언론은 전하고 있다.

◇베네수엘라는=남미 북동부의 카리브해 연안에 위치한 베네수엘라는 1498년 콜럼버스가 처음 발견한 뒤 3백년간 스페인의 식민지였다가 1830년 완전 독립을 쟁취했다. 그러나 정정 불안이 계속돼 세계 2차대전 직후까지 군인들이 나라를 통치했다. 1958년 독재 정권이 무너졌으며 이후 민주행동당(AD)과 기독교사회당(COPEI)이 번갈아 집권했으나 잦은 경제 위기와 부패 등으로 지지도가 떨어지면서 98년 MVR당의 우고 차베스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주요 국가 수입원은 원유 수출로 확인 매장량은 약 2백억배럴이다. 석유산업이 국내총생산의 27.4%(2000년 기준)를 차지하며 금·철광석 등의 지하 자원도 풍부하다.1인당 국내총생산(GDP·2000년 기준)은 5천달러 수준이다. 백인과 인디오의 혼혈인 메스티조가 인구의 60% 이상을 차지한다. 면적은 91만㎢, 인구는 2천4백만명이다.

정효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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