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수원 가꾸며 지친 삶 달래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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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8면

금성출판사 e-비즈 기획본부 도태좌(59)이사. 그의 삶은 참으로 이채로운 구석이 있다. 회사원이다 농사꾼으로, 이제는 회사 임원이면서 농사를 짓는다.

1993년3월 그는 19년간 정든 금성출판사에 미련없이 사표를 던졌다. 편집국장 3년을 지내던 때였다.

"답답했어요. 이렇게 살아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죠. 무조건 쉬고 싶더군요."

그는 그래서 무작정 사표를 내고 시골로 내려가기로 했다. 그러나 초등학교 교사이던 아내는 '절대 NO'였다. 아무리 설득해도 막무가내였다.

할 수 없이 그는 혼자라도 내려가기로 했다.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다대2리에 과수원 5천 평을 샀다. 허름한 농가주택이 딸려 있었고 사과·배나무 3백여 그루가 심어져 있었다.

보따리 하나를 달랑 짊어지고 내려간 도씨는 이튿날부터 삽과 괭이를 손에 쥐었다. 과수원의 풀을 뽑고 메마른 바닥을 일구었다.4월에는 사과와 배나무를 더 사다 심었다. 밤·자두·대추나무도 심었다.

병아리 1백 마리를 사다가 기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농고를 졸업한 그였지만 농사는 결코 쉽지 않았다. 며칠이 안돼 손은 부르트고 입술도 말라갔다. 두세 달이 지나자 말라죽는 나무도 속출했다. 자식을 잃는 듯 가슴이 아렸다.

혼자서 밥을 해먹는 일도 예삿일이 아니었다. 한 달에 두세 번 아내가 휴일이면 내려와 반찬은 챙겨줬지만 밥은 꼬박꼬박 혼자 해먹어야 했다. 아내는 운전을 못해 매번 시골 버스를 타고 오르내렸다.

"이 양반이 대체 왜 이러나. 농사꾼이 된 모습을 보고는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시골살이에 반대한 게 아니라 남편이 재능을 썩인다고 생각하니 안타깝더군요. 잡지 편집에는 유능한 사람이었거든요." 부인 전숙자(58)씨의 말이다.

가을이 되니 농사일이 손에 좀 붙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기르던 닭들이 죽어나갔다. 겨울 무렵에는 한 마리도 남지 않았다.

춥고 긴 겨울이 다 가고 1994년 봄이 되자 회사에서 의외의 연락이 왔다. 다시 일하자는 제의였다. 자리는 단행본을 발행하는 계열 금성에디컴 대표. 애들과 함께 살고 싶고 홀아비 생활에 신물이 난 데다 농사일에도 영 자신이 없어진 탓에 그는 이를 받아들여 귀경했다. 1994년 5월이었다.

문제는 농사짓던 과수원의 처분이었다.

"미련을 버릴 수 없었어요. 팔기에는 아깝고 썩인기도 뭐했죠."

그는 그래서 원거리 영농을 결심했다. 회사에 다니면서도 휴일이면 반드시 혼자 양평으로 내려갔다. 과수원의 풀을 뽑고 물을 주고 나무도 더 심었다. 가지치기도 혼자 했다.3년여는 열심히 책을 보면서 그대로 농사를 지었다.

그래서 지금은 사과나무가 5백여 그루, 배 3백여 그루, 밤 50여 그루, 자두 7 그루, 대추 50여 그루나 된다.3년 전부터는 반대하던 아내·자식들도 재미를 붙여 휴일에는 함께 가 농사를 짓는다. 요즘은 '재산도 되고 얼마나 좋으냐'는 주변의 부러움도 산다.

가을이면 수확하는 사과·배·대추·밤·감자 등을 이웃들에게 나눠줘 인심도 쓴다.

요즘도 도씨의 손은 회사원 손 같지 않다. 손바닥에 굳은살이 더덕더덕 붙어 농부 손 같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힘들고 재미없어 어찌 사냐고 할 겁니다. 농사가 좋고 자연과 더불어 사는 맛은 해보지 않으면 모르죠." 도씨 부부는 조만간 아예 이곳으로 옮겨가 살 생각이다.

J섹션 김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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