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같은 봄날' 우리가 만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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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만화 시장이 여전히 '흐림'이다. 지난해 만화 잡지 여섯 종이 폐간된 시련을 딛고 올 초 두 종의 잡지가 새로 승부수를 던졌지만 성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단행본 시장에서도 초판 발행 부수가 예년에 비해 눈에 띄게 줄었다. 이유가 뭔가. 우선 1997년 만화 '천국의 신화' 사태 이후 작가들의 '자율검열' 강화에 따른 독자 감소 및 판매시장 위축이라는 '얽힌 사슬'이 좀체 풀리지 않는 데 있다. 여기에 IMF 체제 편입 이후 늘어난 대여점은 '만화는 빌려보는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하는 데 톡톡히 기여했다. 그 결과 '창작열기 위축→독자감소→판매시장 축소(대여점 증가)→작가수입 감소→창작열기 위축'이라는 악순환이 거듭되고 있는 것이다.

이 고리를 끊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사보고 싶은 좋은 만화를 많이 내놓는 것일 게다. 최근 몇몇 30대 중견 만화가가 선보인 노작(作)에서는 악순환의 사슬을 끊으려는 시도가 두드러진다.

월간지 『웁스』(학산문화사)에 연재되는 윤태호(33)씨의 '발칙한 인생', 격주간지 『윙크』(서울문화사)에 실리고 있는 박희정(32)씨의 '피버', 그리고 최근 1인 웹진(www.xtaatu.com)을 만든 김준범(35)씨의 '엑스타투' 등이 그런 예다.

허영만·조운학씨 문하로 들어가 단편 '혼자 자는 남편'으로 기발한 상상력을 검증받은 윤씨는 99년 '야후'(월간지 『부킹』 연재 중)로 문화관광부에서 '오늘의 우리 만화상'을 받았다.

박씨는 93년 '그해 여름의 이야기'로 데뷔해 '호텔 아프리카'(95년)로 대번에 주목받는 작가로 떠오르더니 지난해에는 모든 순정 만화가의 꿈이라는 일러스트집(『시에스타』)을 내고 화랑에서 전시회도 열었다.

허영만씨 문하에서 시작해 89년 '기계전사 109'로 화제를 모은 김씨는 '부전자전'(94년)으로 만화가협회 신인상을,'따로따로 형제'(98년)로 YWCA 선정 '좋은 만화상'을 수상했다.

이들의 신작에는 공통점이 있다. 각각 5회 남짓 진행된 정도지만 우선 탄탄한 이야기 구조가 돋보인다.

"모든 장르를 이 작품에서 소화해 보고 싶다"는 김씨의 '엑스타투'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검투사·군인 등 싸움꾼으로만 환생해 활약하다 요절하는 주인공을 그린, 팬터지와 SF가 결합된 작품이다.

몇년 전 잠깐 선보였다 도중하차한 적이 있는 '발칙한 인생'은 하루하루를 무료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골목길 인생들에게 어느 날 야구공 하나가 생기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그린 블랙 코미디.

윤씨는 "야구를 즐겼던 문하생 시절, 여의도 공터에서 다른 팀들과 즉석 대결이 벌어지곤 했습니다. 실력은 부족해도 승부욕은 가득한 사람들에게서 민초들의 모습을 발견했지요"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피버'는 또래 그룹에 섞이기를 거부한 한 여고생의 자아 찾기를 386세대의 감각으로 들여다본 작품이다.

생생하고 뚜렷한 작품 속 캐릭터들은 강한 흡인력을 갖고 있다. '발칙한 인생'에서 '개가죽'으로 불리는 백수 박태화를 보자. 사자처럼 뻗친 머리로 크고 작은 동네 싸움에 시시콜콜 끼어들면서 주먹이 달리면 물어뜯기도 마다하지 않는 불같은 성질의 소유자다.

윤씨는 "이렇게 불량해 보이는 박씨가 동네 야구단을 결성해 경기를 벌이며 건강한 사회인으로 변신하는 모습을 지켜보라"고 했다.

'피버'에서 걸쭉한 경상도 사투리로 폐쇄적인 여주인공 형인의 마음을 여는 데 성공한 미소년 강대의 외모와 말투에서 보이는 묘한 언밸런스의 미학과 학교에서 쫓겨난 싸움꾼 지준의 고독한 얼굴에서 얼마나 많은 이야기 거리가 숨겨져 있는지 예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엑스타투'1화에서는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잘생긴 부잣집 아들을 흠모하는 여자애를 좋아하게 된 주인공 양민의 갈등이 본격화한다.

이들 작품에서 무엇보다 눈에 띄는 특징은 문하생들의 도움을 최소화하고 작가 스스로 들이는 공력이다.

기분이 동하면 한장 그리는 데 3일 걸리는 것이 예사라는 박씨에 대해 『윙크』 편집부 오경은 기자는 "마감이 늦어 화가 나면 주인공 옷을(그리지 말고)벗기라고 독촉할 정도"라면서 "그래도 꽉 찬 느낌의 그림을 받고 나면 금세 마음이 풀린다"고 말했다.

붓으로 그린 듯한 특유의 그림체를 고수하는 윤씨나 컴퓨터 앞에 매달려 점 하나하나 신경을 쓰는 김씨 역시 꼼꼼함은 마찬가지다. 개인 웹진의 유료화라는 새로운 방법을 시도한 김씨는 "업데이트가 늦어도 좋으니 질 좋은 만화를 그려달라는 팬들의 e-메일이 추상(秋霜)같다"고 말했다.

만화가 이현세씨는 얼마 전 기자에게 "유명해지기 전, 직접 화이트로 수정하던 시절의 만화들이 가장 소중하다. 커피물 얼룩 하나에도 추억이 묻어 있다. 만약 불이 난다면 그놈들만 갖고 도망갈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재미있고 좋은 작품 만드는 데 정성을 다했던 '초심(初心)'을 되찾은 만화가들. 이들의 혼이 깃든 작품을 한장한장 넘기며 다음 회를 기다리는 독자들의 설렘의 정도야말로 한국 만화 중흥의 바로미터가 아닐까.

정형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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