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뱅과 국민적 합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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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발전산업 민영화를 둘러싼 정부와 노조의 지루한 대치가 급기야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정부는 '민영화 철회'를 고수하는 노조의 입장에 근본적인 변화가 없는 한 협상에 나서지 않을 방침임을 천명한 데 이어 일정 시한까지 복귀하지 않는 종업원은 모두 해고할 것이라고 쐐기를 박았다.

이에 맞서 민주노총은 총파업 카드를 빼들었다. 뒤질세라 전교조는 불법 '조퇴 투쟁'을 선언했고, 민영화 원칙에만은 합의해 한숨 돌린 줄 알았던 철도와 가스 노조마저 동조파업을 결의했다. 노조로서는 급진 성향을 지닌 모 후보의 인기가 최근 급부상함으로써, 어떻게든 12월 대선까지 버티면서 막강한 투표력을 무기로 민영화 논의를 백지화하려고 내심 계산하고 있는 듯하다.

마치 제임스 딘이 주연한 영화 '이유 없는 반항'에서 마주 보고 달리는 자동차로 잘 알려진 이른바 '담력게임(chicken game)'을 보는 느낌이다. 연이은 정치 일정과 월드컵 등 국가적 대사를 앞둔 시점에서 도대체 나라가 어디로 가는 것인가. 1997년 대선에 발목이 잡혀 지지부진했던 기아자동차 처리 문제가 결국 외환금융위기를 증폭시킨 악몽이 재현되지 않을까 근심스럽다.

세계적인 추세인 발전산업 민영화를 우리라고 비켜갈 특별한 사정이 없음은 재론할 필요가 없다. 전통적으로 전력·통신·가스 등 유틸리티의 공급은 네트워크에 내재된 '규모의 경제'를 논거로 공공부문에 의한 이른바 '자연독점'이 당연시됐다. 그러나 기술의 발달, 세계화 및 시장의 비약적 확대로 인해 이제 그러한 가설은 퇴색됐다.

정부가 독점하기보다 시장을 분할해 민간에 이양하고 경쟁적ㆍ대체적으로 공급해야 '주인 있는 기업'으로 거듭나 창의와 다양성을 극대화하고 자율과 책무를 담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각국의 경험 및 그동안 진행된 민영화의 성과에 관해 최근 발표된 실증분석 결과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므로 민영화의 시기·절차나 방법에 관한 미세 조정(fine-tuning)은 필요할지언정, 노조가 주장하는 것처럼 '전면 재고'나 일부 시민단체가 제시한 '국민적 합의에 입각한 처리'는 문제의 무책임한 이연(移延)에 그칠 공산이 크다. 이해관계가 이질적이고, 때로는 상충되기도 하는 다양한 계층의 국민 모두를 만족시키는 '합의'는 이상향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케네스 애로도 집단적 의사결정을 통해 모든 국민의 선호체계와 완벽하게 부합하는 대안을 찾는 것은 유감스럽게도 불가능함을 일찍이 설파한 바 있다. 따라서 누구에게도 손해를 끼치지 않고, 적어도 한 사람에게는 이득이 되는 신기루를 탐색하기보다 대다수 국민에게 도움이 되는 변화를 선택하는 것이 현실적인 차선책이다. 다만 그러한 변화에 따라 '신뢰이익'이 침해될 계층에 대한 최소한의 보상과 기득권에 대한 경과조치는 마땅히 배려해야 한다.

비단 발전산업의 민영화에 국한되는 논리가 아니다. 우리나라가 선진 사회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향후 상당기간 다방면에 걸쳐 기존의 틀을 깨는 개혁의 산고를 감내해야 한다. 이번 사태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하면 앞으로도 명분과 실리를 모두 갖춘 개혁마저 그저 '뜨거운 감자'로 내연(內燃)하거나 표류할 가능성이 크다. 민영화처럼 빅뱅(big bang), 곧 파급효과가 큰 개혁을 완수하려면 다음 네가지 요건이 필수적이다.

첫째, 개혁의 필요성에 대한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 둘째, 비전이 명확하고 방안이 구체적이어야 한다. 셋째, 성과를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넷째, 저항을 제어할 수 있는 정치력을 구비해야 한다. 금융실명제나 '하나회' 척결은 이들 요건을 모두 갖춘 대표적인 개혁사례다.

김대중 정부의 후반기에 들어 급격히 취약해진 것은 마지막에 거론한 '정치력'이다. 정치력의 원천은 개혁주체의 정통성과 솔선수범이다. 자신들은 개혁을 주문할 자질과 자세를 갖추지 않은 채 남에게 개혁을 요구할 수는 없다. 개혁에 수반하는 고통을 분담하고 집권 프리미엄을 과감하게 포기하는 자기 희생도 따라야 한다. 대선 후보들이 부디 새겨듣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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