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소국 恨 알기나 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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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한국을 잘 안다는 캐나다인 샘 카터 교수는 캐나다인과 미국인의 차이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미국이라는 강대국의 이웃으로서 느끼는 콤플렉스가 있다. 그것은 한국인의 한(恨)과 같은 감정일 것이다."

그의 박학다식함을 인정하면서도 한 사람의 한국인으로서 그의 대답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기가 매우 힘들었다. 강대국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콤플렉스에 있어서 한국인의 그것과 캐나다인의 그것이 과연 비교나 될 것인가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대뜸 지난 몇 달간 폭발적 인기를 누린 조수미의 '나 가거든' 뮤직비디오 민비 시해 장면이 생각났다. 한·일 공동주최 월드컵이 코 앞으로 다가온 지금, 그 노래가 방송에서 뜸해진 이유를 궁금해하는 마음 역시 우리의 한과 무관치 않다. 그 뿐이랴. 탈북자 난민지위 문제, 조선족 동포 국내지위 문제, 하다 못해 납을 매단 생선 문제까지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 전전긍긍하는 우리 정부가 더 못마땅한 것도, 그 옛날 우리 할머니들이 청나라로 끌려갔다 풀려와서도 "화냥년(환향녀)"소리 속에 죽어가야 했던, 그 뼈 속에 박힌 한을 우리의 공기처럼 마셔온 탓이었다. 약소국민의 한, 그것은 한국인의 유전정보다.

그런데 미국에 대해서는 어떤가?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작전이 아니었다면 '2002:로스트 메모리스'에서는 서울이 조선인민공화국의 제2도시였을지도 모른다고 믿으면서도, 한국 민간인에 대한 미군범죄를 다루는 SOFA협정 내용에 심한 굴욕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우리와 미국과의 관계 말이다. 대다수 국민은 '북한에 의한 공산통일'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한·미 군사공조의 불가피성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심리 기반은 2년 전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이 나눈 힘찬 포옹의 기억 속에서나, 햇볕정책 드라이브 속에서도 건재하고 있다. 또 물건을 실어 나르는 무역에서건, 사람을 실어나르는 관광·이민·유학에서건 미국은 어제의 일본과 중국의 대 한국 영향력 전체의 누적치를 앞서는 영향력을 우리에게 끼치고 있다.

이 정도의 밀접한 관계라면 그 관계의 중심에는 상호 신뢰가 자리잡아야 하지 않을까? 단골가게라고 값도 따지지 않고 산 생선이 이미 오래 전 한물 간 물건이었을 때 느끼는 배신감은 떠돌이 노점상에게 속아서 느낀 배신감과는 비교가 안되게 깊고 강렬하다.

국방부의 F-15K 선정과정에 대해 미국의 강매압력 때문이라는 의구심이 증폭되고 F-15기종이 미국 보잉사의 열등 구 모델 정리세일 아이템이라는 지적이 일고 있는 가운데 인터넷에서는 디지털 문화시대의 최첨단 병기인 MP3 파일로 소위 '엽기DJ'파일이 돌아다니고 있다. 전화벨소리로 시작하는 이 패러디 파일은 김대중 대통령이 조지 부시 미 대통령에게 거는 전화로 F-15자전거를 사면 "부품땜새 상당히 골치가 아프지 않겄느냐"로 시작, "뭐, 십년 안에 공장이 폐쇄될지도 모른다고… 이 잡것이 그런 무책임한 소리가 어디 있어, 억지로 사라면서"를 거쳐 울화가 치민 金대통령이 육두문자를 동원해 욕을 하며 끝이 난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이 파일을 들어보고 느끼는 시원함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정도면 군사전문가 사이의 공방이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수년 전 미국에서 식용 불가능 판정이 내려진 미국산 연어통조림이 한국으로 수출되었을 때, 그 지역 의원들이 우리 정부에 수입불가 판정을 번복해달라며 강력한 로비를 벌인 적이 있었다. 그 때 MP3 파일이 돌아다녔다면 어떤 형태였을까? "너나 먹어라"가 아니었을까?

미국이 내세우는 청교도적 윤리의 제1 황금률은 '내가 당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이다. 미국이라면 내 자식들이 타고 싸워야 하는 전투비행기를 그 기종으로 자그마치 5조원이나 주고 사기로 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전투기에 문외한인 나보다는 미국의 로비 전문가나 정치 지도자들이 더 잘 알 것이다. 만약 그 대답이 "우리라면 아니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와 다르다"라면 한국인의 그 깊고 강렬한 응어리, 약소국민의 한이라는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정말 무책임한 장사, 당장은 이익이라도 길게는 크게 밑지는 비합리적 선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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