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보다 더 싫은 여자의 굴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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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딸입니다."

출산의 고비를 넘겼다는 안도감은 곧 절망으로 변한다. 딸이라는 소식에 산모의 어머니가 산모의 상태를 걱정하기에 앞서 딸의 시집에서 이 사실을 어찌 받아들일지 전전긍긍하는 장면으로 영화 '써클'(사진)은 시작된다. 출생부터가 축복이 아니라 저주였던 그녀들.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녀들이 부닥치는 모순은 더 커지고 깊어지기만 한다. 이 영화는 그런 이란 여성들의 아픔에 대한 보고서다.

2000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이 영화는 1999년 '하얀 풍선'으로 한국 관객들과 만났던 이란의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작품이다. 금붕어를 갖고 싶어하는 한 천진한 아이의 하루를 그렸던 전작처럼, 비전문 배우를 기용하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이른바 네오 리얼리즘의 연장선상에 서 있다.

주인공은 감옥에서 막 나온 네 여인이다.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지만 사생아라는 이유로 가족에게 버림받는 파리, 고향인 라질리그로 돌아갈 꿈에 부푼 나르게스, 2년 만에 풀려났지만 마중 나오는 가족이 없자 낙심해 낯선 남자에게 몸을 맡기는 아레주, 그리고 첫 장면에서 딸아이를 낳았던 솔머즈 등이 그들이다. 감독은 이들이 테헤란의 뒷골목을 방황하면서 겪는 작고 큰 사건들을 통해 이들의 꿈이 하나씩 꺾이는 과정을 보여준다.

여인들은 남편이 동행하지 않으면 기차표 한장 살 수 없고 호텔에도 묵을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다시 감옥으로 들어간다.

이들의 감옥행을 통해 감독은 "세상은 감옥보다 나을 것이 없으며, 따라서 이들은 단지 큰 감옥에서 작은 감옥으로 사는 곳을 옮긴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영화 종반부, 호송 버스 안에서 남자들이 담배를 꺼내문 뒤에야 비로소 담배 연기를 내뿜는 여인의 모습은 그런 의미에서 체념한 자의 여유로 다가온다.

동선을 그대로 따라가는 느릿느릿한 진행은 할리우드 영화 문법에 익숙한 우리에겐 다소 지루하다.

그러나 이 영화의 상영을 이란 정부가 그토록 막았고 베니스 영화제 개막 사흘 전까지도 상영 여부가 불투명했다는 사실은 그만큼 이 영화가 고발하는 현실이 충격적이라는 것일 게다. 그리고 그 '현실'이란 정도의 차이만 있지 지구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게 아닐까. 16일 개봉. 전체 관람가.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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