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책 없는 공공도서관 : 신간은 "대출중" 전문서는 "없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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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책이요 ? " "저는 도서관에 그냥 공부하러 와요. 세무사 시험 준비 중이거든요." 염근민(29·서울 은평구 역촌동)씨는 휴관일을 빼고는 매일 종로구 화동 정독 도서관을 찾는다. 하지만 도서관에서 책을 본 기억은 거의 없다. 언제나 참고서를 들고 공부하기 바빴다. 정독도서관의 일반 열람실 1천여석은 매일 꽉꽉 들어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순전히 책을 보려고 도서관을 찾는 이용객을 만나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지난해 6월 고양시립 마두도서관은 어머니와 자녀가 함께 와 책을 찾아 읽는 어린이 열람실을 늘리려다 이용자들 입김 때문에 포기했다. 수험 공부를 하는 일반 열람실 이용객들이 대자보를 붙이고 연명부를 작성해 고양시에 민원을 넣었다. 일반 열람실의 좌석이 줄어드는 점을 염려한 이용객들이 실력 행사를 한 것이다.

한성대 지식정보학부 이용남 교수는 "이용자들만 탓할 수 없다. 도서관이 독서실처럼 운영돼 온 것은 해방 이후 계속된 고질병"이라며 "공부방이 아니라 자료를 이용할 수 있는 도서관으로 서비스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도서관은 가까이 있으며 보고 싶은 책이 많은 곳, 책 읽기 좋은 분위기를 갖춘 곳으로 새롭게 자리매김돼야 한다는 것이다.

◇책이 없는 도서관=용산도서관의 지난해 도서 구입비는 1억4천1백만원. 전체 운영비의 8.5%에 불과하다. 인건비와 기본 운영비의 비중이 훨씬 높다.

다른 공공 도서관도 사정은 비슷하다. 우리나라 공공 도서관 한곳당 평균 예산은 4억3천7백만원으로 그중 도서 구입비는 12% 정도다. 그 돈으로는 3만5천종의 신간 중 16.4% 수준인 5천7백권 가량을 살 수 있다. 외국의 경우 출판 시장이 안정된 것도 도서관 수가 많고 신간 구입이 활발하기 때문이다. 책이 팔릴 시장이 확실하니 일반 독자 수요가 적어도 자료로서 귀중한 책을 서슴없이 낼 수 있다.

도서 구입비가 모자라 이용자들이 많이 찾는 책을 대량 구입하는 것도 힘들다. 아무리 인기있는 책이라도 서너권 구입이 고작이다. 최인호씨의 소설 『상도』의 경우 정독 도서관은 네질을 구입했으나 관외 대출실에 두질, 이동문고 한질, 자료실 한질을 배치하고 나니 이용자들에게는 "언제나 없는 책"이 되고 말았다. 장서수는 무의미하며 오래된 책, 쓰지 않는 책은 원칙에 따라 폐기하고 이용률 높은 신간 위주로 도서 구입비를 늘려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턱없이 부족한 시설·인력=인구 36만명인 의정부에는 도서관이 한 곳이다. 시민회관 3층에 1983년 지어진 시립도서관은 공영주차장·회관을 운영하는 의정부시 시설관리공단이 관리를 맡고 있다. 사서직도 99년에야 처음 생겼다. 사서 한명이 36만명의 독서 생활을 책임지고 있다.

각 공공 도서관의 사서직원 수는 현재 법정기준의 22% 수준이다. 행정직·임시직을 통틀어 다섯명 미만이 꾸려나가는 곳도 전국 도서관 중 31.5%에 이른다. 이런 인력 구조에서 품질 좋은 서비스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현재 서울시만 하더라도 공공 도서관은 42곳이지만 기존의 교육청 산하 도서관과 사립 도서관을 포함한 숫자다. 말 그대로 지자체에서 지역민을 위해 지은 도서관은 여덟곳뿐이다.

성격이 변질되는 곳도 많다. 마포도서관은 마포평생학습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서예·무용 강좌 등 각종 교양 강좌의 인기가 높자 아현분관을 둬 도서 열람 서비스를 따로 떼어내고, 수영장·헬스장까지 마련하고 1백개 가까운 강좌를 개설한 문화센터가 돼버렸다. 고덕·영등포·중계도서관도 평생학습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도서관 네트워크로 활용도 높여야=이치주 국립중앙도서관 정보화담당관 사서서기관은 "마을문고 등을 공공 도서관 중심으로 연계하는 것도 가까운 도서관, 편한 도서관을 만드는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동 단위로 흩어져 있는 소규모 문고는 운영 노하우가 부족하다. 그러나 큰 규모의 공공 도서관과 인력·장서가 호환될 수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마을문고는 책을 찾는 창구 역할을 하고 공공 도서관은 문고에 없는 책을 지원해 주며 전문 사서가 정기적으로 지도를 맡는다면 훨씬 내실있게 변모할 수 있다.

그러나 이에 앞서 도서관 시설을 늘리는 하드웨어에 대한 지원과 도서관 내부의 장서를 제대로 갖추며 사서 인력을 충원해 주는 소프트웨어에 대한 지원을 병행해 네트워킹할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다.

홍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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