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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절 풍미한'인천의 성냥공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4면

한때 인천 하면 성냥공장이 떠오르던 시절이 있었다. 군에 입대하면 군가보다 먼저 전수받던 노래가 '인천의 성냥공장'이었다.

"인천의 성냥공장/성냥공장 아가씨/하루에 한갑 두갑…"으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한국전쟁 이후 한동안 군인들 사이에서 가장 널리 불린 '애창곡'이었다.

성냥은 인천 제조업을 일으킨 불씨였다. 인천항 개항 후 외국인들이 크게 늘어나자 생필품인 성냥의 수요도 급증했다.

1886년 인천에 국내 첫 성냥공장이 생겨났으며 1917년에는 국내 최대 규모의 성냥공장인 조선인촌회사(朝鮮燐寸會社)가 문을 열었다.

이 회사는 '우록표' '쌍원표' 등의 제품을 생산했으며 상시 고용인원은 여성 3백명, 남성 1백명이 넘었다. 하루 평균 2만7천개비, 연간 7만 상자를 생산, 당시 국내 성냥 소비량의 20%를 차지했다.

조선인촌 주위에 수백개의 성냥공장이 들어서면서 국내 성냥 총생산량의 70%를 인천이 책임졌다.

성냥산업이 인천에서 번창한 이유는 ▶당시 압록강 일대에서 벌목한 나무들이 신의주를 거쳐 인천항으로 반입돼 재료 구입이 수월했고▶인천항 주변에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값싼 노동력이 풍부했으며▶인천의 전력 수급이 서울 등 다른 지역보다 원활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하지만 해방 후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지포(Zippo)라이터가 유행하면서 성냥의 가치도 떨어져 조선인촌회사도 60년대에 문을 닫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일회용 라이터가 등장하면서 성냥산업은 급속도로 사양길로 접어들어 지금은 경북 영주 등지에만 대여섯곳의 성냥공장이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90년대 접어들어 인천은 성냥 대신 라이터 생산의 메카로 변신해 '불의 도시'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지만 이마저 중국 라이터업체들의 물량공세에 밀려 갈수록 위축되고 있다.

인천=정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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