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제2부 薔薇戰爭 제2장 楊州夢記 : 楊州에서 장보고를 처음 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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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그 무렵 당나라는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이 일으킨 '안사의 난'과 평로절도사였던 이사도가 일으킨 '번진의 난', 두 개의 대란으로 쇠퇴일로에 있었다.

청년 두목은 이 어지러운 당나라의 정세를 팔장을 끼고 수수방관할 수만은 없었다. 그가 당시 황제였던 경종(敬宗)의 사치한 궁궐을 비판하여 '아방궁(阿房宮)의 부(賦)'란 장시를 지은 것도 바로 이 무렵 두목의 나이 23세 때의 일이다.

아방궁은 시황제가 세운 궁전으로 항우가 진나라를 멸하고 불태웠을 때 3개월이나 꺼지지 않고 계속 탔다는 대궁궐이었는데, 두목이 이 아방궁을 빗대어 황제의 고대광실을 풍자했던 것은 정신 차리지 않고 계속 사치와 허영에 탐닉하면 진나라처럼 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성토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두목의 경종은 그대로 적중되었다.

이듬해 황제 경종은 환관에 의해서 피살되었으며, 그 뒤를 이어 문종(文宗)이 제14대 황위에 올랐던 것이다. 그러자 두목은 그동안 소홀히 여겼던 관직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재야에 있으면서 조정의 부패와 무능을 성토하기보다는 직접 관직에 진출하여 현실에 참여함으로써 개혁하려는 열정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두목의 집안은 대대로 벼슬을 했던 '사환(仕宦) 명문가'였다.두목의 조상으로는 『춘추좌전집해(春秋左傳集解)』로 유명한 두예(杜預)가 있으며, 그의 할아버지는 두우(杜佑)로 당대 최고의 명저인 『박문강학(博聞强學)』을 저술했던 대학자였다.

다행히 매년 왕경이었던 장안에서 열리던 과거시험이 두목이 머무르고 있던 낙양에서 이례적으로 열린 것은 행운이었다. 26세가 되던 봄 정월에 열린 지방시에 급제한 두목은 그해 윤3월 장안에서 열린 과거에서 정식으로 등과(登科)하여 관리가 되었다.

이후 두목은 홍주(洪州), 선주(宣州)의 자사를 역임하다가 마침내 32세 되던 해 꿈에도 그리던 양주의 자사로 부임되어 온 것이었다.

당나라 말기 최고의 시인이었던 두목은 두 번에 걸쳐 이 양주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뛰어난 열정과 감수성을 가졌던 천재시인 두목에게 있어서 당나라 최고의 상업도시 양주는 그야말로 신선들이 살고 있던 꿈의 도원경이었으며,시상을 떠올릴 수 있는 창작의 산실이었다.

먼 훗날 두목이 양주에 있었던 지난 일들을 회상하면서 꿈과 같이 아름다웠던 『양주몽기(楊州夢記)』란 문집을 남기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두목이 얼마나 양주를 사랑하고 있었던가를 미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두목은 『양주몽기』에서 양주의 아름다움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양주는 도시 전체가 뛰어난 경승지로 되어있다.

중성(重城)에 저녁 어둠이 내리면 창루(娼樓)위에는 항상 청홍색의 홍등 수만개가 공중에 휘황찬란하게 번득이며 줄지어 있다. 구리삼십보의 긴 거리에는 진주와 비취보석이 꽉 들어차 있어 그 모습은 가히 선경(仙境)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두목이 표현하고 있는 중성은 양주를 감싸고 있는 두개의 성을 말하는 것으로 자성(子城)은 주로 관리들이 살고 있는 내성을 가리키는 것이며, 나성(羅城)은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상인들이 살고 있는 외성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또한 '구리삼십보'의 길거리는 양주에 있었던 유명한 '십리장가(十里長街)'를 가리키며 바로 이 번화가에는 부유한 상인들을 상대로 하는 창루, 즉 술과 노래와 웃음을 파는 창기(娼妓)들이 내건 붉은 홍등이 수양버들 늘어진 운하를 따라 두목의 표현처럼 휘황찬란하게 밤거리에서 번쩍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바로 그 꿈의 거리 양주에서 두목은 장보고에 관한 소문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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