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수 없는 세상을 보여 드립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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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9면

일요일 강원도 춘천에서, 그것도 비를 맞으며 달려온 사람치고는 표정이 너무나 밝았다. 갑작스러운 서울 나들이가 영 번거로웠을텐데도 불쾌한 기색 하나 없이 편안한 얼굴이다.

이 '양반' 유진규(50)는 마임이스트다. 수식을 덧붙이면 한국마임의 개척자요, 그래서 1세대의 맏형으로 불리는 사람이다.

"침묵없는 말은 허상에 불과"

유씨는 마임 외길 30년을 걸어온, 우리시대의 드문 장인(匠人) 예술가다. 그가 최근 책을 냈다기에 속으로는 '마임론(論)' 정도의 묵직한 책을 기대했었다. 그러나 출판사에서 보내온 것은 에세이집 『말하지 않기에 더 느낄 수 있습니다』(중앙M&B)였다.

"예술가연 하는 사람들이 쓴, 또 그렇고 그런 잡문이겠군." 다소 실망스러운 자세로 책장을 넘겼는데, 막상 내용은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이 책에는 '침묵의 예술' 마임을 통해 득도한 삶의 지혜와 성찰의 알갱이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중수필의 묵직한 멋과 맛도 느껴졌다.

침묵에 대한 단상을 보자. "말이 없는 침묵은 그저 무(無)일 뿐 그 어떤 의미도 갖지 않는다. 침묵이 없는 말은 무게를 갖지 못하여 입 밖을 떠나는 즉시 사라지는 허상에 불과하다."(92쪽) 그래서 "말 속에 침묵이 있으며 침묵 속에 말이 있다"는 게 유씨의 '침묵예찬'이다.

마임(Mime)은 한때 무언극(無言劇)으로 번역됐다. 지금은 '마임'이란 말 그대로 쓰는 게 보통인데, 어쨌든 일반인들의 상식 속에는 '분칠한 피에로'가 연상되는 정도의 미약한 장르로 자리잡고 있다. 그런 음지에서 별다른 보상도 없이 30여년간 마임 보급과 창작에 힘써온 사람이 바로 유진규다.

"나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마임이 갖는 표현의 자유로움을 절감하고 있다. 내 몸 하나 눕히지 못할 좁은 공간에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몸만 갖고 하는 행위지만 이 안에서 표현 못할 것은 거의 없다. 내 몸짓 하나로 이 좁고 제약된 공간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가 되기도 하고, 우리가 접해 보지 못한 넓은 우주가 되기도 한다."(39쪽)

유씨는 1970년대 중반 건국대 수의학과를 다니다 '뭔가 다른 나'를 찾기 위해 연극계에 몸을 던진다. 당시 실험적인 작업을 많이 한 극단 '에저또'에 의탁한 것도 '다름'을 추구하고픈 열정에서 비롯됐다. 유씨는 그때 마임이란 걸 처음 들었다. 지금도 꾸준히 활동하는 김성구가 그때의 동료였다. 막상 가르쳐 줄 사람이 없으니 둘은 프랑스문화원 등을 돌며 마임이론과 실기를 독학했다. 그가 직접 만든 첫 마임 '육체표현'(76년)은 그런 과정에서 빛을 보게 됐다.

"뭔가 다른 나 찾으려 무대에"

그러나 마임과 연극에 한창 재미를 붙일 즈음 그에게 예기치 않은 전환점이 온다. 70년대 말 신촌시장 골목에 허름한 터를 잡고 실험예술의 한 시대를 풍미한 기국서의 '76소극장'이 세를 내지 못해 문을 닫게 되면서 그 또한 활동 무대도 잃게 된 것. 이때 받은 상처가 너무 커 81년 무작정 춘천행을 감행한다.

"서울은 사람의 자존심을 형편없이 구겨버리는 도시야." 당시 또 한명의 예술동지였던 한국화가 김병종(서울대 교수)이 회상하는 그의 춘천행 변(辯)이다. 서울 출신 유씨는 이때부터 춘천을 제2의 고향으로 삼아 그곳에서 20여년을 살고 있다.

춘천 국제마임축제 이끌어

"갓 결혼한 새댁(아내)과 줄행랑치듯 서울을 빠져나와 정착한 곳이 춘천 교외의 신남역 근처였지요. 1만여평의 야산을 사 소를 키우기 시작했어요. 소값이 괜찮아 한 서너해 잘 나갔는데, 85년엔가 소값 파동으로 망했어요."

결과적으로 한국 마임을 위해 이때의 실패는 잘된 일이었다. 유씨는 예술·사회와의 불화를 털고 마임으로 돌아왔다. 이제 세계적인 마임축제로 해외에 잘 알려진 '춘천마임축제'는 이때부터 그의 공력이 쌓여 이룩된 것이다. 89년 임도완·유홍영·심철종·최규호 등과 함께 한국마임협의회를 만들고 처음 개최한 '한국마임페스티벌'이 춘천마임축제의 시발점이었다. 물론 시련도 있어, 과도한 스트레스는 그에게 뇌종양을 안겼지만 이 또한 지금은 극복한 상태다.

"90년대 중반 께 '난 작가로서 끝났다'며 심한 슬럼프에 빠진 적이 있어요. 뇌종양도 그때쯤 왔는데, 역시 시련은 잘 활용하면 보약이 될 수 있는 법이란 걸 알았죠."

유씨에게 마임은 곧 마음이요, 세상이요, 우주다. 그런 생각으로 그는 마임을 '몸짓'이란 우리말로 바꿔 부르며 한국형, 아니 유진규형의 몸짓을 연구하느라 오늘도 분주하다.

정재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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