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재의 시시각각] 경제가 진범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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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당장 반론이 나올 수 있다. 올 1분기 우리 경제는 지난해보다 8% 넘게 성장했다. 대기업들이 훨훨 난 덕에 수출·무역수지 등 각종 거시지표도 좋다. 그런데 경제가 무슨 죄냐며. 그러나 경제가 범인임을 입증할 결정적 증거가 있다. 증거 A는 경제지표들의 속내다. 화려한 거시지표와 달리 집권 2년 반, 이명박 정권의 민심 경제 성적표는 한마디로 별로다. 지난 정권보다 가계 빚은 늘고 일자리는 줄었다. 29세 이하 청년 일자리는 더 줄었다. 소득도 쪼그라들어 쓸 돈은 없는데 물가는 계속 올랐다. 중산층은 더 줄어들고 양극화도 심해졌다. 그러다 보니 실망 매물이 안 쏟아질 수 없다. 바닥 민심은 싸늘한 아랫목 경제를 따라 이미 식을 대로 식었지만 천안함에 가려 잠시 안 보였을 뿐이다.

물론 MB로선 억울하고 속상할 일이다. 해 놓은 게 좀 많으냐고 하소연도 하고 싶을 것이다. 세계 경제가 그렇게 어려울 때 이만큼 해낸 게 어딘데, 그 공을 몰라주니 야속하기도 할 것이다. 사실이 그렇기도 하다. 과감한 재정투입으로 우리는 어느 나라보다 빨리 위기를 넘겼다. 덕분에 외환위기 이전 수준으로 신용등급도 올랐다. 세계 각국의 칭송도 많이 받았다. 중동까지 직접 날아가 수십조원어치의 원전 공사도 따냈다. 이만하면 경제 대통령 자격이 차고 넘친다고 할 만하다. 지지율 50%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대통령과 대기업의 화려한 실적은 그저 ‘보기 좋은 떡’일 뿐이었다. 바닥 민심엔 내 몫, 내 일자리라는 ‘먹기 좋은 떡’이 줄었다는 당장의 현실이 더 와 닿았던 셈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론 경제가 범인이란 증거가 부족하다. 당장 힘들 뿐이지 장기적으론 소득이 늘고 살림살이도 나아질 것이란 반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를 반박할 증거 B가 필요하다. 증거 B는 ‘경제와 정치가 한통속’이란 사실이다. 경제 따로, 정치 따로로 일관해 온 MB에겐 좀 불편한 진실일 수 있다. 예컨대 야당의 표적이 된 세종시·4대 강이 그렇다. 경제 효율로만 따지면 세종시 수정안은 백 번 옳다. 4대 강도 속도와 우선순위의 문제일 뿐 꼭 필요한 사업이다. 문제는 세종시와 4대 강이 정치 쟁점화하면서 생겼다. 경제는 효율이지만 정치는 타협이다. 타협이 안 되면 사회적 비용이 많이 든다(이번에 쏟아진 ‘반대표’도 그런 비용 중 하나다). 자칫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질 수도 있다. 이럴 땐 타협하는 게 경제 논리로도 맞다. 가능한 한 비용이 덜 드는 쪽을 택하는 게 효율적이므로. 그러나 세종시와 4대 강 앞에선 그런 ‘정치적 경제’ 논리는 아예 작동하지 않았다.

김대중 정부 시절 청와대 수석을 지냈던 정치인 K씨는 “진짜 경제 대통령은 정치적 비용을 잘 줄이는 대통령”이라며 “DJ도 그런 고민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그는 DJ가 경제 관료들을 경제 장관에 앉힌 걸 두고두고 후회했다고 전했다. “효율과 합리성만 따지는 관료들의 경제 논리에 막혀 개혁도 복지도 어정쩡하게 하다 말았다”며 “그 바람에 바닥 민심을 잡는 데 실패한 게 많았다”는 이유다. 조순 전 경제부총리가 지난달 “경제 정책은 결국 정치가가 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진범을 찾고 나면 다음은 쉽다. 소득·일자리를 늘려 바닥 민심 경제를 끌어올리고 큰 갈등은 양보·타협하는 ‘정치적 경제’에 집중하면 된다. 선거 다음 날 “경제 살리기에 전념하겠다”는 MB의 선택은 그래서 옳다. 더 이상 경제 따로, 정치 따로만 아니라면.

이정재 중앙SUNDAY 경제·산업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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