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부끄러움과 곤혹 사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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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지금도 첫 강의를 했던 그날을 생각하면 경황없이 허둥대던 자신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선배교수가 쥐어준 분필갑과 출석부를 들고 강의실에 들어선 순간 눈앞에 쇄도해 오던 수많은 시선들. 그 고립무원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한 시간을 버텼는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기만 하다. 새파란 햇병아리 강사가 강단에 섰을 때의 난감함이란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으로부터 온다. 과연 내가 이들을 가르칠 능력이 있을까? 그것은 학위와 같은 일종의 자격증으로만 충족될 수 있을 능력이 아닌 것 같았다. 나를 쳐다보는 학생들의 눈빛에는 지식 이상의 것에 대한 기대가 서려 있는 듯했고 그 시선이 젊은 강사에게는 무척 버거웠던 것이다. 지금은 연륜과 경험이 쌓여 적당히 인생론을 갈파하기도 하는 노회한 교수가 돼 있지만 앞서의 물음은 여전히 유효한 듯 싶다.

가르치는 교수로서의 자격지심과 아울러 학자로서 느끼는 근원적인 곤혹감도 있다. 석사 논문을 쓸 때부터 "과연 이게 말이 될까?"하는 의구심을 수없이 느껴가며 글을 만들어 나간다. 물론 학위과정의 논문은 지도교수의 가르침과 엄격한 논문형식이 객관성을 보장해 주긴 한다. 그러나 이후의 논문쓰기는 필자의 경우 보고서와 수필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듯한 길항의 과정 속에서 이루어졌다. 머리 속에서 예정했던 논리대로 글을 진행하다가 가속이 붙으면 글 자체의 논리가 생겨나 미끄러지는 경향이 생긴다. 이 지점에서 갈등이 일어난다. 내용에 의해 글이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글에 의해 내용이 구성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과의 투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결국 어떠한 논문도 문학화의 욕망을 떨치긴 어렵다. 그런데 그 문학화가 내용을 어떻게 보증해 줄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이 대두되는 것이다.

가르치는 일과 글쓰기에 대한 이런 저런 상념 끝에 눈에 띤 책이 2년 전에 나와서 지식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던 앨런 소칼, 장 브리크몽 공저의 『지적 사기』(민음사, 2000)였다. 당시 포스트 모더니즘의 열기에 찬물을 끼얹기도 했던 이 책은 물리학자인 저자들이 냉철한 자연과학자의 입장에서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대학자들이 과학지식을 어떻게 남용·오용해 얼마나 학계와 대중을 기만하고 있는지를 거의 고발에 가까운 필치로 기술하고 있다. 그들은 라캉·크리스테바·보드리야르·들뢰즈 등 포스트모더니즘을 주도한 학자들의 저작에서의 신비화, 모호한 용어의 의도적 구사, 불명료한 사고, 과학적 개념의 오용 등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특히 그들은 과학을 수많은 이야기나 신화 또는 사회적 구성물 중의 하나로 간주하는 인식론적 상대주의에 대해 강한 적개심을 표명한다. 아울러 많이 대중화된 카오스 이론이 사실은 심각한 오해의 산물이라는 점도 밝힌다. 카오스 이론이 마치 과학의 한계를 보여준 듯 단언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실제 자연 속에는 비카오스계가 더 많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필자도 내심 뜨끔한 바가 있었다. 신화를 전공하고 있는 관계로 그 의의나 가치에 대해 얘기하다 보면 가끔 피상적인 지식으로 과학의 한계가 어떻고, 카오스나 프랙탈 구조가 신화와 닮았으니 어쩌니 하고 설명할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필자는 이 책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다. 이 책에는 순수한 자연과학의 입장이라기 보다 너무 많은 정치적 복선이 깔려 있는 듯하다. 미국 실용주의의 프랑스 철학에 대한 반발인 듯 싶기도 하고, 우익 보수주의의 진보노선에 대한 공격 같기도 하며, 가부장적 전통과학의 신과학에 대한 혐오감의 표현으로 비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라캉 등이 과학을 그릇 적용한다고 비난하면서 그들 자신도 인문학을 과학으로 재단하려는 우를 똑같이 범하고 있다. 인문학에 수용된 과학은 인문학의 논리로 풀어야지 과학의 메스를 들이 댈 대상이 이미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우리가 가끔 이론적 말장난에 빠져 있을 때 현실 입지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는 점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말류가 언어와 텍스트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인해 공리공담의 지경에 이른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고대 중국에서도 한 때 '청담(淸談)'이라는 논쟁의 시기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철학과 문학상으로 많은 생산적인 논의를 했으나 결국에는 허황된 말장난으로 전락해 망국의 한 원인이 된 바 있었다. 바로 이 점, 학문의 진정성과 관련해 마지막으로 드는 생각은 라캉 등의 행위가 과연 '지적 사기'에 해당할까 하는 점이다. 이 책의 저자들은 의도적으로 사기를 쳤을 수도 아닐 수도, 아니면 둘 다 일수도 있다고 아리송하게 답한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앞서 토로한 보고서와 수필 사이의 갈등을 떠올려 본다. 그들 역시 그런 곤혹을 느끼지 않았을까?

<이화여대 교수·중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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