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훈범의 세상사 편력

대의는 ‘여럿에서 하나로’ 나아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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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과잉의 시대입니다. 여기저기서 각지고 날 선 주장들이 쇳소리를 내고 불꽃을 튀깁니다. 두 동강 난 천안함 앞에서 북한을 보복 공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는가 하면, 한국 정부의 자작극이라는 음모론도 여전합니다. 4대 강 사업이 환경을 살린다고도 하고 생태계를 죽인다고도 합니다. 무상급식을 놓고도 찬성과 반대의 목청들이 행여 질세라 핏대를 세웁니다. 작은 사건 하나에도 주장과 반박이 줄줄이 달리는 인터넷 세상에 선거까지 더해 데시벨을 한껏 올립니다.

민주사회에 다양한 견해가 공존하는 게 무에 나쁘겠습니까. 서로 방향이 다른 생각들이 대화와 타협의 나들목을 거쳐 발전을 향한 한 길로 모아지는 게 민주주의 아니겠어요. 그런데 그 나들목이 막힌 게 문제입니다. 우리 사회가 그렇습니다. 대화와 타협은 보이지 않고 설득과 양보도 병목에 걸렸습니다. 오로지 주장과 반대만 새치기해 들어옵니다. 조선 선비 홍길주가 개탄한 19세기 지식인 사회의 병폐가 사회 전반으로 확대된 모양새입니다. “나와 같으면 칭찬하고 받들며, 나와 다르면 천하게 여기고 욕한다.” 욕되게 하려고 없는 사실을 꾸며내기도 합니다. ‘남한이 북한을 선제 공격한다’는 문서도 돌고 ‘17세 이상의 남자를 강제 징집한다’는 문자도 날아다닙니다. “빨리 퍼뜨려주세요”라는 당부도 있었다지요. 광우병 파동 때도 그랬지만 오직 목표는 증오의 증폭과 확산입니다.

우리 청소년 여러분들이 그런 볼품없는 문서나 문자메시지에 휘둘리지는 않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하지만 증오의 거품을 걷어내고도 엇갈린 주장 중 무엇이 옳은지 헷갈릴 때가 많을 겁니다. 여기서 제 의견을 말하진 않겠습니다. 사실 저도 헷갈리는 게 있고 제 견해를 여러분께 강요하려는 생각은 조금도 없으니까요. 판단은 여러분 몫입니다. 여러분이 옳은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조금이나마 돕고 싶은 게 제 바람일 뿐이지요.

『채근담(菜根譚)』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의심한다고 자신의 견해를 버려서는 안 되고, 자신의 생각만 옳다고 남의 말을 물리쳐서도 안 된다. 작은 은혜를 사사로이 베풀어 대의를 상해서는 안 되고 공론을 빌려 사사로운 감정을 해결해서는 안 된다.”

앞 문장은 쉽게 이해될 겁니다. 줏대 없이 흔들려서도 안 되지만 나만 옳다는 독선도 곤란하다는 말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러분 나이 때는 기성 권위에 반감을 갖기 쉽습니다. 기존 질서에 대한 거부가 인류 발전의 원동력이 된 것도 사실이고요. 그렇다고 젊은 세대가 늘 옳았던 것은 아닙니다. 낡은 관습을 없애는 혁명가를 자처했지만 결국은 중국 사회를 퇴보시키고 만 홍위병들은 바로 고교생과 대학생들이었습니다. 서양의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의 선봉에도 고교생과 대학생들이 서 있었습니다. 과거 이탈리아에서는 첫눈이 오면 대학생들이 눈 뭉치로 유대인을 공격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지요. 유대인들이 이를 피하려면 대가를 치러야만 했습니다. 토리노에서는 25듀카트를 내야 했고, 만투아에서는 사탕절임, 파두아에서는 살찐 수탉 한 마리를 지불했답니다. 사회적 약자를 괴롭히는 그릇된 관행이었지만 젊은이들이 즐겼던 거지요. 나치 독일에서도 히틀러의 전위대는 고교생과 대학생들이었습니다. 나치가 구호를 외칠 때마다 주요 지지세력으로 앞장섰지요.

이성보다는 격정에 쉽게 사로잡히고, 그래서 섣부른 판단을 할 수 있음을 인정하면 훨씬 유연한 사고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뒷문장을 볼까요. 앞 문장에서 나를 성찰했다면 뒤의 것은 남에 대한 판단 기준으로 삼아도 될 듯합니다. 좀 어렵긴 해도 뜻은 명확합니다. 당리당략이나 정파 이익 같은 사감(私感))을 버리고 이 나라, 이 땅을 위하는 대의(大義)를 세웠느냐가 그 주장의 옳고 그름을 가리는 준거가 된다는 말입니다. 물론 어떤 주장이든 대의로 포장하고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한 꺼풀 벗겨보면 그런 주장으로 이득을 얻는 사람이 보일 겁니다. 그런 주장일수록 상황 변화에 따라 여러 색깔로 된 ‘대의’의 옷을 갈아입기 쉽지요. 그러한 변신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관련 기사를 날짜를 거슬러 역순으로 읽어보는 것도 방법입니다.

미국의 국장(國章)에는 ‘여럿에서 하나로(E pluribus unum)’라는 라틴어 문구가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초강대국 미국을 만들어 낸 힘입니다. 대의를 생각하는 주장은 그렇게 ‘여럿에서 하나’로 나아갑니다. 대의란 여럿 있는 게 아니니까요. 사감 낀 주장은 반대로 움직입니다. 그 이유는 설명이 따로 필요없을 겁니다.

이훈범 중앙일보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