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 이슈] 한국 "걸려도 그뿐" 미국 "범죄행위 … 퇴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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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지가 보통 B4 크기의 얇은 갱지라 속이 비치는데 이보다 작은 A4 용지에 내용을 적어 시험지 밑에 깔고 보는 친구도 봤어요. 갈수록 대담해지는 것 같아요."(전북 S중 최모양)

"내신시험에서 '짜고치기'가 흔하니까 교사나 학생이나 '좋은 게 좋은 것'이란 인식이 커요. 그러니 부정행위가 적발돼도 죄의식이 별로 없죠."(경기도 O고 이모군)

'커닝'으로 통칭되는 부정행위는 비단 수능만의 문제가 아니다. 학교 내에서의 시험 부정행위는 광범위하고 수법도 다양하다. 실제로 이번에 적발된 학생 중 일부는 모의고사 등 학교 시험에서 미리 손발을 맞춰본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학교가 각종 부정행위의 백화점이자 실험실습장이 된 셈이다.

교육인적자원부는 2008학년도 대입부터 수능을 등급화하는 대신 학생부(내신)의 비중을 높일 계획이어서 이런 광범위한 부정행위를 바로잡지 못하면 공교육의 신뢰성은 결정적으로 흔들릴 수밖에 없다.

또 청소년들이 부정행위에 무감각해짐으로써 '미래의 부정직한 인간'을 국가가 제도적으로 양산한다는 비판도 피할 길이 없다.

◆ 부정행위 백태=경기도 S고 손모양은 "시험 때마다 커닝하는 친구들이 있다"며 "일단 감독 교사가 만만해 보이면 미리 암호를 정해 대담하게 하는데 한 번도 적발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책상에 답을 써둔다거나 쪽지를 주고받고 필기도구에 답안지를 말아넣는 행위 등은 고전적인 수법. '설마'하는 상식의 허를 찌르는 대담한 수법도 학교 시험에서는 의외로 많다. 커닝 페이퍼를 시험지 밑에 두거나 참고서를 서랍 안에 두는 행위가 그렇다.

이번 수능에서 드러난 휴대전화를 이용한 수법도 학생들에게는 하나도 새로울 게 없다. 서울 C고 윤모군은 "시험이 끝날 즈음에 책상 위에 엎드려 옷 안으로 휴대전화 문자를 보내면 그냥 문제 다 풀고 자는 걸로 보인다"며 "이번에 적발된 수법들은 전혀 신기한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 처벌 가능성은 작고 이익은 크다=부정행위가 끊이지 않는 것은 적발될 가능성도 작고 처벌 정도에 비해 이익이 크기 때문이다. 부정행위가 심각한 범죄행위라는 인식도 거의 없다. 경기도 모고교 3학년 학생은 "누가 커닝을 해서 100점을 맞았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적발돼 처벌받았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일부 교사들의 온정주의나 무관심도 한몫한다. 서울시교육청 홈페이지에 글을 올린 한 학생은 "한 반 학생 절반이 커닝을 하는데 감독하는 교사와 학부모는 뻔히 보이는 부정행위를 왜 못 막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경기도 한 중학교 3학년 최모양은 "감독관 중에는 MP3플레이어로 눈 감고 음악을 듣거나 학급 뒤편에 있는 게시물만 읽는 분도 있다"며 "심지어는 시험 중간부터 자는 교사도 있다"고 말했다. 성적 부풀리기를 위해 출제될 문제를 미리 가르쳐 주는 등 일부 학교의 잘못된 관행이 부정행위의 뿌리라는 지적도 있다.

◆ 해법은 없나=부정행위의 근원적인 이유는 치열한 입시경쟁과 과정보다 결과만 중시하는 사회풍조에 있다는 게 대다수 전문가의 분석이다.

한국교육심리학회장인 김아영 이화여대 교수는 "선진국 국민의 준법 의식이 높은 것은 그들이 대단히 도덕적이라서가 아니라 법 질서를 엄격히 적용하는 사회 분위기가 축적됐기 때문"이라며 "부정행위에 보다 엄정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대 문용린 교수는 "기술발전의 속도를 못 따라가 우리 사회가 리더십의 '빈틈'을 보인 것"이라며 "기술 발전과 젊은이들의 문화에서 파생된 부정행위 유형을 전문적으로 분석하고 대처할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연세대 황상민(심리학)교수는 "미국 학생들은 우리의 커닝에 해당하는 치팅(cheating)을 반사회적인 범죄와 동일시하지만 우리 학생들은 커닝을 범죄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치팅을 하다 적발된 학생들은 퇴학까지도 감수해야 하지만 우리 학교에선 적당히 넘어가는 것이 문제라는 지적이다.

수능 시험 방법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자는 의견도 많다.

서울대 백순근(교육학)교수는 "답을 숫자로 전할 수 있는 선다형 시험을 수십만명이 하루에 보는 수능 체제가 문제"라며 "모든 사람이 같은 시험을 보는 게 아니라 미국의 SAT1, SAT2처럼 기초.선택.심화 등 단계별로 시험을 나누고 논술형으로 치르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구교육대 정종진 교수는 "수능은 말 그대로 수학 능력을 측정하는 것으로 바꾸고 대학은 각 대학 특성에 맞게 학생들을 뽑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 특별취재팀=김남중.이승녕.하현옥.한애란(이상 정책기획부).임미진.박성우(이상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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