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 이슈] 커닝, 고질화된 시험 부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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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기말고사 때 휴대전화로 답을 전송하는 애들이 한 반에 4~5명은 된다. 커닝 행위를 보고도 선생님에게 알리는 애도 없고, 커닝하는 애들도 걸리는 것에 대해 걱정도 안 한다."(서울 H고 2년 정모군)

"상습적으로 커닝하는 애들이 있는데 나쁜 짓이라는 생각보다는 친구를 도와준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한다. 이를 묵인하는 선생님들도 있다."(안양 S고 2년 손모양)

시험 부정행위가 온 나라를 흔들고 있다. 국가시험인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휴대전화를 이용한 조직적인 커닝과 대리시험이 적발돼 학생 수백명이 경찰 조사를 받는 기막힌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도덕성 마비와 디지털 기술이 결합한 결과라는 분석까지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번 사태는 일선 학교에서 일상화된 고질적 악습이 곪아 터진 것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도를 넘은 학생들의 커닝 행위 장소가 일선 학교에서 수능 고사장으로 바뀌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심각한 것은 대다수 학생이 부정행위를 죄의식 없이 저지른다는 데 있다. 본지 신문활용교육(NIE) 학생기자인 A여고 3학년 김모양이 지난해 3월 자신의 학교와 이웃 학교 학생 26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는 부정행위에 대한 불감증이 어느 정도인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응답자의 54%인 146명이 '커닝은 나쁘지만 때론 필요하다'고 했다. 또 48%(130명)의 학생들은 부정행위를 할 때 '떨리지만 재미있다'거나 '아무렇지 않다'고 할 정도다.

중.고교뿐 아니다. 초등학교와 대학에서도 부정행위가 '잘못된 행동'이란 죄의식 없이 이뤄지고 있다.

서울 S초등학교 김모 교사는 "얼마 전 수학경시대회와 성취도 평가가 있었는데 시험을 보다가 아무 생각없이 답을 보여주고, 이를 베껴 쓰는 학생들이 있었다"며 "시험이 끝난 뒤 틀린 답을 가르쳐줬다는 이유로 교사 앞에서 친구를 때리는 경우도 봤다"고 말했다.

서울대 재학생인 유모(25.4학년)씨는 "대학 강의실 책상과 벽이 온통 커닝용 낙서로 빽빽하다"며 "커닝하는 학생들은 자신의 행위가 도둑질이라든가 다른 범죄처럼 나쁘다고 여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양대 정진곤(교육학)교수는 이에 대해 "일선 학교에서 내신부풀리기가 이뤄지면서 교사들이 도덕 불감증에 걸려 있는 경우가 적지 않고 학생들도 나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모두 하는 것이라는 심리로 인해 죄의식이 마비됐을 수도 있다"고 진단했다.

어떻게 하다 이런 지경이 됐을까.

우선 '성적 지상주의'의 학교 교육이 학생들의 부정행위를 조장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서울의 한 고교 교사가 털어놓은 부정행위 학생들의 커닝 이유를 들어보자. "공부를 못하면 친구들이 인정을 안 해줘요." "성적이 나쁘면 부모님이 실망해요." 오로지 점수로 학생을 판단하니 '커닝을 해도 별게 아니다'라는 의식이 뿌리내리게 된 것이다.

수능 1, 2점으로 당락이 갈리는 입시제도도 학생들을 '점수'에 목매달게 한다. 한국해양대 김용일(교육학) 교수는 "학생들은 점수따기 게임에서 지면 '패자부활전'이 없는 학벌 중심 사회에서 어떤 대접을 받게 될지 뻔히 알고 있다"며 "이러니 학생들이 부정행위를 통해서라도 이겨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정직.신용에 바탕을 두기보다는 '어떻게든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식의 사회인식도 문제다.

서울 명덕외고 이기찬 교사는 "법과 원칙을 잘 지키는 사람이 오히려 손해를 본다는 인식과 실제로 그렇게 돼 있는 잘못된 사회 시스템이 우리 아이들에게 부정행위를 조장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교육학자.심리학자 등 전문가들은 ▶학교 교육 내적인 문제 ▶입시제도 자체의 문제 ▶사회구조적인 문제 등 원인별로 처방해 나가야 한다고 지적한다.

고려대 권대봉 교육대학원장은 "이번 수능 부정행위는 도덕성 마비와 디지털 기술이 결합한 것으로 교사.교육자들이 휴대전화.문자메시지 등 학생들의 첨단통신기기 문화를 따라가지 못한 것도 한 요인"이라며 "교사들이 이해와 관심도를 높여 '디지털 커닝'시대에 대처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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