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화 공식통용] 현금지급기 새돈 못채워 실랑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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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최종 결별까지는 아직 두달이 남았지만 공식적인 이별 의식은 이미 시작됐다. 이젠 새 친구와 친해지지 않으면 안된다'.

새해를 맞은 유로랜드(단일통화 유로를 사용하는 12개국) 국민의 마음은 이렇게 표현될 듯싶다.1일은 일상 상거래에서 유로화를 직접 사용하는 첫날이다. 일단 휴일이라 다행이다. 그러나 새로운 통화가 생활 속에 뿌리 내릴 때까지 크고 작은 혼란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 마침내 'E데이'=유로권의 대형 백화점과 슈퍼마켓들은 연말에 이미 거래 은행에서 유로화 동전과 지폐를 잔뜩 준비해 놓았다. 10만명의 회원을 거느린 독일 소매상중앙회(HDE)는 "회원들이 평소 준비하던 것보다 12배나 많은 유로화 잔돈을 확보하고 새해를 맞았다"고 밝혔다. 마르크화를 받더라도 잔돈은 모두 유로화로 내줘야 하기 때문이다.

일단 유로화와 구(舊)화폐의 병용(竝用)기간은 2월 말까지다. 그러나 독일의 일부 상점과 음식점은 1일부터 아예 마르크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 이에 대해 HDE측은 "구화폐 병용이 권장 사항인 만큼 상인들이 마르크화를 거부해도 어쩔 수 없다"며 "대부분 상가들은 2월 말까지 마르크화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베를린의 일부 버스와 지하철.택시 등도 마르크화를 거부키로 했다. 두가지 돈을 받을 경우 계산이 복잡해지는데다 마르크화를 받으면 은행에 가서 다시 바꿔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기 때문이다.

벨기에에서도 상당수 점포가 '새해부터 유로만 받는다'는 문구를 써붙여 주민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정부가 나서 2월 말까지는 벨기에프랑도 사용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지만 상점 주인들이 말을 잘 듣지 않는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독일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주는 앞으로 2주간 불법 주차 차량을 단속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불법 주차 티켓 자동 발급기가 1일부터 유로화 전용으로 바뀌었지만 유로화 동전을 확보하지 못한 주민을 배려하겠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주도인 뒤셀도르프의 주민은 "유로화 통용으로 때 아닌 선물을 받게 됐다"며 좋아했다.

◇ 크고 작은 실랑이 벌어진다=프랑스는 많은 은행 노조들이 새해 업무가 시작되는 2일 파업을 예고하고 있어 큰 혼란이 예상된다. 프랑스 최대 은행인 BNP와 크레디아그리콜 등 몇몇 은행은 파업을 막기 위해 노조측과 0.9% 임금 인상에 서둘러 합의했다.

지난해 12월 31일에는 프랑스 현금지급기의 상당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시민들이 예금 인출을 포기하는 사례가 빈발했다. 프랑스 은행들은 "중앙은행이 1일 0시 이전에 유로화 지폐를 지급하는 것을 절대 금지했으며, 그렇다고 수명이 몇시간 남지 않은 프랑화로 지급기를 채우기도 곤란해 그냥 빈 채로 두는 경우가 있었다"고 해명했다.

슈퍼마켓 등 상가의 계산대 앞에는 예상대로 긴 줄이 형성될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 환율 자동 계산기를 구비해 놓았지만 고객과 여러 말이 오갈 상황이기 때문이다. 특히 나이 든 손님과의 마찰이 예상된다.베를린 슈테글리츠구에 있는 라이헬트 슈퍼마켓의 한 점원은 "며칠 만이라도 계산대 근무 직원을 늘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유럽 번영의 기틀 다질 것"=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는 30일 독일 일간지 빌트와의 회견에서 "2차 세계대전 후 마르크화가 번영을 주도했듯이 유로도 국제 통화로서 앞으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프랑스의 로랑 파비우스 재무장관도 같은 날 파리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유로권의 경제력이 유로 가치를 끌어올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오스트리아의 볼프강 쉬셀 총리는 일간지 쿠리에와의 회견에서 "우리가 단일통화 정책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9.11 테러의 후유증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유로 안쓰는 영국 동향=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는 신년사에서 "유로의 성공적 정착은 영국의 이익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은 국민의 반대로 언제 유로권에 가입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관광지로 개방된 영국의 버킹엄 궁전과 왕실 저택들은 유로화 등장에도 불구하고 입구와 선물 가게에서 유로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한 관리가 30일 말했다. 그러나 영국 내 많은 상점은 관광객이 쓸 유로화를 받을 채비를 하고 있다.

베를린.파리=유재식.이훈범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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