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MZ에 묻힌 박수근 ‘그림 항아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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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DMZ에는 성곽 같은 유적뿐 아니라 ‘보물 단지’도 묻혀 있다. 국민화가로 통하는 박수근(1914∼65)의 그림 항아리가 묻혀 있는 것이다. 적게는 열 점에서 많게는 수십 점까지 박수근의 작품이 담긴 항아리는 강원도 철원군 원남면의 DMZ 한가운데 묻힌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현재로서 접근이 안 돼 확인할 길이 없다.

박수근의 그림이 DMZ 안에 묻힌 경위는 이렇다. 박수근은 아내 김복순(1979년 작고)씨의 친정인 북한 땅 금성에서 살다가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단신으로 월남했다.

공산당 치하에서 민주당의 김화군 대의원을 지낸 게 불안했던 듯하다. 한국DMZ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함광복(춘천시문화재단 이사장)씨는 산문집 『DMZ는 국경이 아니다』에서 ‘박수근이 민주당 활동을 한 것 때문에 늘 공산당의 표적이었고 수배를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아내 김씨는 박수근의 월남 2년 뒤인 52년 월남한다. 여덟 살 먹은 딸 인숙, 다섯 살 아들 성남 남매를 데리고서였다. 하지만 혼자 힘으로 아이들에 그림까지 짊어지고 월남하긴 무리였다. 김씨는 힘이 부치자 지니고 있던 박수근 작품들을 액자에서 분리해 둘둘 만 뒤 항아리에 넣어 땅에 묻었다고 한다. 함광복 소장은 “생전 김복순씨가 ‘금성과 남대천 사이 야산에 항아리를 묻었다’고 증언했다”고 밝혔다. 금성은 현재 이북 지역, 남대천 역시 DMZ를 관통하는 하천이다. 함 소장은 “전쟁사를 참고하면 그림 항아리가 묻힌 곳은 군사분계선에 바짝 붙은 철원군 광삼리~남둔리 사이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함 소장은 “그림이 수십 장이었던 것으로 전해지는 만큼 온전히 남아 있다면 전체 값어치는 수백억원대일 것”이라고 말했다.

박수근의 제수인 김정자(81)씨의 기억은 좀 다르다. 김씨는 “철원군 원남면에서 피란 살던 시절 집 근처 골짜기에 있던 중공군 방공호 안에 그림 담은 항아리를 가져다 놓고 넓적한 돌로 덮어 뒀다”고 말했다. 원남면 역시 DMZ에 걸쳐 있다. 김씨는 또 “그림 숫자는 많아야 열 점 정도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김씨는 그림을 묻은 시기도 올케 김복순씨와 다르게 기억한다. 생전 김복순씨가 늦가을 월남한 것으로 밝힌 반면 시누이인 김정자씨는 봄이나 초여름이었던 것으로 증언했다.

항아리의 위치, 작품 숫자는 엇갈리지만 그림의 운명에 대해서는 대체로 회의적이다. 거의 60년 전의 일인 만큼 온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박수근 역시 또 하나의 전쟁 피해자인 셈이다.

박수근의 고향 양구에는 그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박수근은 양구에서 태어나 스물한 살까지 살았다.

지금도 양구교육청 뒷동산엔 그가 즐겨 그렸다고 해서 ‘박수근 나무’라고 이름 붙여진 수령(樹齡) 300년 된 느릅나무 두 그루가 남아 있다. 양구읍 중심가에서 자동차로 5분 거리인 정림리에는 박수근미술관이 서 있다. 양구군에서 돈을 대 2002년 문을 열었다. ‘빈 수레’ ‘굴비’ ‘두 남자’ 등 박수근의 유화 5점을 소장하고 있다.

특별취재팀=취재 신준봉 기자, 사진 김태성 기자, 동영상 이병구 기자
취재 협조=국방부, 육군본부, 국군 3·6사단, 국방문화재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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