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해신 - 제1부 질풍노도 (8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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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김흔은 김양의 사촌형으로 김흔의 아버지 장여(璋如)와 김양의 아버지 정여(貞茹)는 서로 형제간이었다.

따라서 김흔과 김양은 모두 태종 무열왕의 9대손이었으나 김헌창의 반란으로 김양의 집안이 멸문한 것과는 달리 김흔의 집안은 기적처럼 살아남아 오히려 승승장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는 김흔의 뛰어난 학문 때문이었다. 김흔은 이미 당대 최고의 대 문장가이자 제일의 학자였던 것이다.『삼국사기』는 김흔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김흔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김양의 성격이 활달하고 사기에 기록된 대로 영특하고 걸출하였다면, 김흔은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는 선비였던 것이었다. 따라서 김흔은 흥덕대왕뿐 아니라 특히 그의 동생이었던 상대등 김충공으로부터 총애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흥덕대왕의 선왕이었던 헌덕왕14년, 김헌창의 반란이 일어나 극도로 나라가 어지러웠을 무렵 김흔의 가문도 태종 무열왕의 후손이었으므로 당연히 멸문의 대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흔이 살아남은 것은 그의 뛰어난 학문 때문이었다. 즉 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려 하는데 적임자를 얻기 어려웠던 것이었다.

이때 헌덕왕에게 나서서 김흔을 추천한 사람은 바로 김충공이었다. 김흔의 학문을 총애하여 어쨌든 구해주고 싶던 김충공은 헌덕왕에게 다음과 같이 김흔을 천거하였다. 그 내용이 『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김흔은 태종의 후예로 정신이 밝고 빼어났으며, 그릇이 깊고 크니 선발할 만 하나이다."

그리하여 김흔은 조공사 김주필(金柱弼)을 따라 당나라에 들어가 뛰어난 활약을 펼쳤던 것이었다.

김흔이 얼마만큼 외교적 능력을 발휘하였는가는 1년 후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황제가 조서(詔書)로서 김흔에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시태상경(試太常卿)의 직위를 제수하였던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을 정도였던 것이다.

헌덕왕은 그의 공로를 치하하여 김흔을 남원의 태수로 제수하였던 것이다. 이에 관한 기록이 『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김흔이 돌아오자 왕은 왕명을 욕되지 아니하였다 하여 특별히 남원의 태수로 제수하였다."

김흔은 특히 흥덕대왕이 즉위하자 오히려 더욱 더 번창하였다. 여러 번 자리를 옮겨 지금의 진주인 강주(康州)의 대도독을 거쳐 지금은 아찬 겸 상국(相國)의 벼슬에까지 오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는 모두 '정신이 밝고 빼어났으며, 그릇이 깊고 크다(精神明秀 器宇深沈)'라고 천거하였던 김충공의 칭찬처럼 그의 빼어난 인덕과 학문을 총애했던 김충공의 배려덕분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두 집안이 같은 형제집안이었으나 한쪽은 멸문 당하였고, 한쪽은 오히려 흥왕(興旺)하는 상극의 길을 걷고 있었지만 그러나 김흔과 김양은 누구보다 절친하고 친형제처럼 믿고 따르고 있었다.

김흔은 김양보다 다섯살 연상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쌍둥이처럼 가까웠으며 실제로 두 사람은 젊은 시절 함께 화랑(花郞)이 되어 전국의 명산을 순례하면서 심신을 연마했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아니 위흔아, 네가 이 밤중에 웬일이냐."

김양이 찾아왔다는 말을 전해들은 김흔은 맨발로 달려나와 김양을 맞으며 말하였다.

"어디 얼굴 한번 보자."

김흔이 김양을 얼싸안고 그 얼굴을 자세히 쳐다본 후 크게 웃으면서 말하였다.

"여전히 잘 생기고 훤칠하구나. 자 들어가자. 들어가서 밤이 늦었지만 술이나 한잔 나누자꾸나."

두 사람이 술상을 놓고 마주 앉았을 때 마침 가까운 분향사에서 해시를 알리는 범종소리가 댕댕댕하고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글=최인호

그림=이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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