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물건너간 공기업 개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26일 오전 국회 건설교통위. 정부가 공공부문 구조조정을 위해 3년 동안 추진해온 한국토지공사와 주택공사 통합법안은 전체회의 토론에도 부쳐지지 않은 채 무산됐다. 한나라당 백승홍.민주당 설송웅 의원 사이에서 있은 20분간의 간단한 여야 간사회의의 결정이었다.

백의원이 "정부의 통합법안을 상정할 수 없다"고 말하자 설의원은 "정부가 제출한 법안을 상정조차 하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되나. 표결에서 지더라도 상정은 해야겠다"고 맞섰다.

결국 양당 간사는 "정부측의 체면이라도 세워주자"며 '법안을 상정은 하되 심의는 하지 않는다'는 기묘한 합의를 도출해냈다. 대체토론과 소위원회의 법안심의 등 후속 입법절차가 진행되지 않으면 법안은 건교위에서 하염없이 표류할 수밖에 없다.

정치권은 그동안 어려운 경제상황을 감안해 뼈를 깎는 아픔을 감수하더라도 공기업의 구조조정을 철저히 수행해야 한다는 말을 입만 열면 강조해 왔다.

특히 한나라당은 "정부가 민간기업의 구조조정에만 칼을 빼들고 공기업 개혁은 외면하는 도덕적 불감증에 빠져 있다"고 지적해 왔으며 많은 국민의 동감을 얻었다.

그런 한나라당이 "취지는 옳으나 졸속 통합의 우려가 있다""이질적인 조직의 통합사례에 대한 검토가 부족하다"는 등의 이유를 대며 통합법안에 대한 심의조차 거부한 것이다.

민주당측도 한나라당과 별로 다르지 않다."절대적인 여소야대 상태에서 입법을 추진할 수 있는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민주당의 설명도 설득력이 없다.

민주당 의원들도 통합에 반대하는 토지공사 노조의 격렬한 항의와 로비를 부담스러워했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한 정책 관련 고위 당직자는 "내년 지방선거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정부안을 밀어붙일 경우 정치적 부작용이 너무 크다"고 토로했다.

그는 "노동계는 민주당으로서 놓칠 수 없는 표밭이 아닌가"라며 "아무래도 통합논의는 다음 정권에서나 가능할 것 같다"고 말했다.

선거를 앞두고 도지는 여야의 병이 이번에도 적용된 것이다. 1997년 대선정국을 강타한 외환위기 사태는 노동법과 금융개혁법안 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정치권의 직무유기가 큰 몫을 했다는 교훈을 되새겨야 할 때다.

전영기 기자 정치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