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노트] '비원옆 음악당'이 아파트 둔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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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뜰 아래 비원'.

아름다운 숲을 끼고 있어 한국 궁궐 중에서도 이름이 높은 종로구 비원 부근에 원룸형 아파트를 짓고 있는 한 시공업체의 광고문구다.

아파트가 들어서는 부지는 원래 국내 모 그룹이 음악당을 짓기로 했던 곳이다. 비원과 창경궁.종묘, 좀 나아가 경복궁이 들어서 있는 지역적인 특성을 감안하면 음악당을 세우기로 한 것은 손색이 없는 선택이었다.

그렇다면 이 부지에 '뜰 아래 비원'을 두게 된다는 아파트를 왜 짓는 것일까. 명승지와 유적지 부근에 마구잡이로 건물을 세운다면 경관이 망쳐진다는 점을 무시한 것일까.

그 과정을 들여다 보면 행정절차나 법규를 위반한 구석은 눈에 띄지 않는다. 음악당을 짓기로 했던 그룹의 자금 사정이 여의치 않아 이를 민간업체에 매각했다는 것이다. 서울시측은 또 "아파트가 들어서는 지점은 비원으로부터 1백m 이상 떨어져 문화재 보호.관리의 법규에도 어긋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서울시 문화재위원회도 지난 8월 회의를 열어 건물의 설계 변경을 인정해 줬다. 지상 9층의 아파트가 들어서더라도 비원 주변의 스카이라인이나 일반인들의 조망권을 해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부지를 매각한 모 그룹도 용도를 변경하는 과정에서 특별한 혜택을 보지 않았다고 서울시측은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은 크게 남는다. 원래 이 지역은 서울시가 40억원을 들여 '걷고 싶은 거리'를 만들고 있는 곳이다. 이른바 '문화의 벨트'를 만들어 도시의 삶에 지친 서울시민들에게 휴식 공간을 넓혀 준다는 구상이다.

특히 서울시는 당초 음악당 부지 옆에 소공원을 조성키로 했다. 음악당을 원룸형 아파트로 바꿔 짓는 것은 이러한 계획을 상당 부분 훼손하는 결정이다. 바로 인접한 비원의 분위기를 망치는 것은 물론이고 문화적인 거리를 조성하는 데도 방해가 된다.

서울시는 부지 음악당이 원룸형 아파트로 바뀌는 과정에서 좀 더 고민했어야 옳았다. 이는 '문화의 세기'에 살기 위해 갖춰야 하는 최소한의 덕목인 것이다.

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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