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잘된 수능, 잘못된 수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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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어떤 분이 국내 한 영자신문에 며칠 전 실렸다는 글을 보내주었다. 일본 가고시마대학 로버트 파우저 교수가 '한국 교육의 우매화'라는 제목으로 쓴 칼럼이다.

제목부터 다소 과격하게 들리는 이 칼럼에 따르면 한국의 교육문제는 정부의 일관성 없는 교육정책과 언론의 과잉관심이 한국인의 교육열에 상호 작용해 생기는 것으로 파악,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 국가 경쟁력 문제와 직결

'올해 수능시험 출제자들은 시험의 우매화에 용감하게 대처했고, 따라서 해야 할 일을 한 것에 대한 칭찬을 마땅히 받아야 한다. 최근 몇년간의 시험 경향이 점검되지 않은 채 방치되었더라면 교육 성취는 크게 쇠퇴했을 것이고 결국은 세계화 경쟁에서 국가 경쟁력을 약화시켰을 것이다.'

수능시험 소동으로 대통령과 교육부총리까지 나서 국민들에게 유감을 표시한 마당에 외국 학자의 주장을 빌려 올해 수능에 문제가 없다고 두둔할 생각은 없다. 다만 많은 수험생과 학교가 수능 이후 '공황' 상태에 빠졌다면 뭐가 문제인지 냉정하게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그동안 수능은 응시자 상위 50%의 평균점이 97학년도에 1백점 만점에 54.1점에서 매년 높아져 98학년도엔 60점대, 99학년과 2000학년도엔 70점대로 뛰고 지난해엔 84.2점까지 올랐다.

특히 '물수능'으로 불린 지난해엔 만점자가 66명이나 나와 만점을 받고도 대학 입시에서 낙방하는 웃지 못할 일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이같은 점수 상승은 응시자들의 학업능력이 향상됐다기보다는 문제가 너무 쉽게 출제됐기 때문이었다. 오죽하면 '문제 지문을 보지 않고 답지만 봐도 정답이 깃발을 흔들고 있다'는 말이 나왔겠는가.

지난해 시험을 계기로 수능 난이도를 적절히 높여야 한다는 교육당국의 판단은 어느 정도 공감대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당국은 기회 있을 때마다 올해 수능이 '다소' 어려울 것이라고 사전 예고해왔다.

그러나 수능 당일 출제위원회는 "예상점수 발표를 삼간다"고 했다. 그 이유로 7만명 이상의 재수생 감소, 계열간 응시자 비율의 급격한 변화, 1학기 수시모집 합격자들의 응시 포기 등 변수가 많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출제위원회는 내부적으론 난이도가 재작년(상위 50% 성적이 1백점 만점에 77.5점)수준 안팎으로 높아져 4백점 만점 기준으로는 16~37점 정도 떨어질 것으로 기대했으나 결과적으로 60점 이상 떨어졌으니 예상이 크게 빗나가고 말았다.

수능시험은 고졸자 전체 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유일한 국가시험이다. 대학입시에서 일부는 자격기준으로, 그리고 더 많은 대학에서는 전형자료로 삼는다. 따라서 수능시험은 고교에서의 학습 성취도의 목표수준이 될 수밖에 없다.

출제위원회가 설명하듯 이번 수능은 고차원적 사고력을 측정하는 아주 좋은 문제가 많이 나왔고, 응시자가 다같이 어려웠으니 점수 하락은 문제가 안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번 수능 소동은 '이해찬 1세대'란 변수와 정부 정책에 대한 신뢰의 문제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소질과 특기 한가지만 있으면 대학 간다'는 무시험 전형 구호를 믿고 학습을 소홀히 한 세대들에게 지난해의 '물수능'에 대비되는 문제를 들이댔으니 그 배신감이 얼마나 크겠는가. '다소' 어려운 게 아니라 목표했던 것보다 2배나 어려웠다면 문제가 아무리 좋았다 해도 할 말이 없다.

점수가 조금만 떨어져도 과외가 성행하리라는 우려가 나오는 게 무시할 수 없는 우리 현실이다. 결국 이번 수능은 방향을 제대로 잡아놓고도 의외의 변수로 인해 망친 꼴이 됐다.

*** 자격.학력고사중 택일해야

정부는 2005학년도부터 수능제도를 전면 개편키로 하고 얼마 전 5개 시안을 발표했는데, 이들 시안속엔 최근 수능을 둘러싸고 제기된 문제가 모두 포함돼 있다. 특히 수능을 순수한 자격고사로 할 것인지, 아니면 변별력을 위주로 한 학력고사로 할 것인지,오래 계속된 논란도 결론내릴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

한천수 <사회담당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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