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방향 잃은 쌀시장 정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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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12일 오전 농협중앙회 대강당.

김동태 농림부장관은 제6회 농업인의 날(11월 11일)행사에 참석해 "1백년 만의 가뭄을 극복하고 대풍을 일군 농업인들의 노고를 치하한다"고 말했다.

#13일 오후 서울 여의도공원.

전국에서 올라온 전국농민회총연맹 소속 농민 1만여명은 "쌀값 하락을 막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라"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농민들은 "쌀시장 개방 획책을 철회하라"고 외쳤다.

10년 전 우루과이라운드(UR)협상을 앞두고 농민들이 쌀시장 개방 반대 시위를 벌였을 때와 그다지 변하지 않은 모습이다.

UR협상 당시 정부는 10년 후 쌀시장 개방 재협상을 할 무렵에는 우리 농업이 어느 정도 경쟁력을 갖출 것이라고 장담했다. 생산 효율을 높여 국내외 가격차를 줄이면 쌀시장을 더 개방해도 충격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UR협상이 타결된 지 8년이 지난 오늘도 우리 농정은 그 때 그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벼농사에서 뚜렷한 혁신이 일어나지 않았고, 재고가 쌓이는데도 추곡 수매가는 계속 올렸다. 농민들은 해마다 수매가 인상을 요구했고, 표를 의식하는 의원들도 수매가 인상에 관대했다.

그 결과 쌀 수요가 90년 1인당 1백19㎏에서 지난해 93㎏으로 줄었는데도 쌀 생산과 재고는 계속 늘었다.오죽하면 13일 농민단체가 올해 생산한 쌀 3백만섬을 앞당겨 북한에 지원하자고 주장했을까.

정부는 쌀 재고가 처분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자 뒤늦게 쌀소비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농가에 지원한 정책금융의 금리를 내리는 등 농심(農心)달래기에 나섰다.

하지만 이같은 미봉책으로 2004년 재협상을 앞둔 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카타르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WTO)각료회의에서도 농산물 수출국들은 우리의 쌀 재고를 붙잡고 늘어졌다. 쌀시장 개방이 유예된 나라는 현재 한국과 필리핀 뿐으로 마냥 미루기가 쉽지 않다.

대책 없이 버티다가 쌀시장이 더 열리면 우리 농업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빠질 수 있다. 정부는 하루 빨리 수요.공급에 맞춰 쌀 생산을 조정하는 중장기 계획을 짜고, 냉엄한 국제통상 협상의 현실에 대해 농민들을 설득해야 한다.

정철근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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