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남진우 '낮잠' 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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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헌책방 으슥한 서가 한구석

아주 오래된 책 한 권을 꺼내 들춰 본다

먼지에 절고 세월에 닳은 책장을 넘기니

낯익은 글이 눈에 들어온다

아,전생에 내가 썼던 글들 아닌가

전생에서 전생으로 글은 굽이쳐 흐르고

나는 현생의 한 끄트머리를 간신히 붙잡고 있다

한 세월 한 세상 삭아 가는 책에 얼굴을 박고

알 수 없는 나라의 산과 들을 헤매다 고개를 드니

낡은 선풍기 아래 졸고 있던 주인이 부스스 눈을 뜨고

이제 문 닫을 시간이라고 말한다

인생은 짧고 낮잠은 길다

-남진우(1960~) '낮잠'중

교육부 장관님(문화부 장관님도 함께 보십시오), 저희들이 헌 책방에서 '먼지에 절고 세월에 닳은 책장'을 넘기던 시절이 전생이었습니까 아니면 전생의 전생이었습니까?

우리가 교실의 교과서, 과외시간의 참고서, 독서실의 문제집, 수험장의 시험지, 교보문고의 베스트셀러 속에서 붙잡고 있는 이 '현생의 한 끄트머리' 저 반대쪽의 옛날 옛적에는 '독서'라는 전설적 시대가 있었다지요. 긴 낮잠에서 깨어나니 벌써 문닫을 시간, 마지막 과외비를 납부하고 수능시험 치를 기회를 마련해 놓으셨군요.

김화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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