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종수의 세상읽기

개방경제의 숙명을 깨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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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그러나 어쩌랴. 변방의 작은 나라가 저 혼자만 잘한다고 잘살 수 없는 게 현실인 것을.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에게 삿대질을 한다고 해서 충격이 덜어지지도 않거니와 남들이 알아서 경제회복을 도와주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번에도 정부는 부랴부랴 그리스 재정위기의 파장을 줄이기 위한 대책 마련에 나섰다. 이번 남유럽발 경제위기의 원인이 된 국가 부채를 줄이겠다며 재정의 허리띠를 졸라매기로 했고, 금융회사들의 외환 건전성도 꼼꼼하게 챙기기로 했다. 다행히 유럽연합(EU)과 국제통화기금, 그리고 미국까지 나서서 남유럽발 재정위기의 확산을 막는 데 총력전을 펼치기로 한 터라 이번 위기가 지난 번 위기만큼 파장이 크지는 않을 것이란 관측이 유력하다. 그러나 아직 위기가 완전히 진화된 것도 아니고, 자칫하면 유로존 전역으로 위기가 번질 위험성이 여전한 만큼 안심하기엔 이르다. 그러니 우리나라로선 위기의 불똥이 튀지 않기를 바라면서, 설사 불똥이 튀더라도 불길이 크게 번지지 않도록 대비를 단단히 해두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자꾸 심사가 꼬이는 건 어쩔 수 없다. 도대체 왜 매번 남이 저지른 불장난에 우리가 피해를 보고, 또 어디서 불길이 치솟지 않을까 불안에 떨어야 하느냐 말이다. 고매한 경제학자들은 소규모 개방경제인 우리나라는 외부의 충격을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숙명을 안고 있다고 한다.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가 개방을 포기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세계경제를 좌지우지할 만큼 덩치가 크지도 않은 만큼 위기가 터지면 눈치껏 피하고, 피할 수 없으면 힘 닿는 대로 버티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흡사 밖에서 날아드는 뭇매를 요령껏 피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대들지 말고 결대로 맞으라는 얘기로 들린다. 정말 그렇다면 참담하기 그지없는 노릇이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일까. 해외발 금융위기가 우리나라에 파급되는 과정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초래한 세계적인 경기침체는 꼭 우리나라만 피해를 본 것이 아니므로 일단 제쳐놓자. 금융위기로 우리나라가 입은 직접적인 타격은 세계적인 신용경색이 부른 외화 유동성 부족이다. 돈줄이 마른 글로벌 금융회사들이 우리나라 같은 신흥국에서 자금을 회수하면서 멀쩡하게 돌아가던 국내 금융회사들이 갑자기 외화자금난에 빠져들었다. 달러나 유로처럼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기축통화를 쓰는 나라에서는 중앙은행이 돈을 더 찍어내면 그만이지만, 우리처럼 국제적으로 통용되지 않는 통화를 쓰는 나라에서 급격한 자본 유출이 일어나면 심각한 외환부족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원화 표시 자산이 아무리 든든해도 달러가 없으면 신용위기에 몰리고, 나라 전체로는 국가 부도의 위험에 빠지게 된다. 이 때문에 무리하게 거액의 외환보유액을 쌓아놓고 있는 것이다. 외화가 웬만큼 빠져나가도 버틸 수 있다는 믿음을 국제금융시장에 주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이다.

이제 한국경제가 외부의 위기에 취약한 길목이 어디인지 분명히 드러났다. 위기상황이면 언제나 나타나는 외자 유출과 외환 부족 현상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언제든지 충분한 외화를 조달할 수 있는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것이다. 정부가 G20 정상회의에 정식 의제로 상정한 글로벌 금융안전망 구축이 바로 그 안전장치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안전망에 관한 논의는 이제 겨우 시작단계에 불과해 언제 구체화된다는 보장이 없는 게 영 불안하다.

다른 한 가지는 위기 상황에서 급격한 외화 유출입을 막는 것이다. 이는 개방의 후퇴로 비칠 소지가 있으나 두 차례 위기를 겪고 난 지금은 어느 정도의 자본 통제는 필요하다는 주장이 국제사회에서 공감을 얻고 있다. 아시아의 금융허브를 자처하는 싱가포르가 간접적인 자본 통제 방식을 도입해 큰 효과를 보고 있다는 점도 참고할 만하다. 투기성 외화자금이 무분별하게 드나드는 것만 막아도 해외발 금융위기 때마다 속절없이 뭇매를 맞거나 불안에 떠는 일은 피할 수 있다. 글로벌 금융안전망과 부분적인 자본 통제를 함께 갖출 수 있다면 위기 상황에서의 방패막이로는 금상첨화일 것이다. 이제는 소규모 개방경제의 숙명을 깨뜨릴 때도 됐다.

김종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