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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와 돼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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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왁자지껄한 잔치 치르는 데 일가견 있는 나라 중 하나가 그리스다. 할리우드 영화 ‘나의 그리스식 웨딩(My Big Fat Greek Wedding)’을 보면 결혼식에 가문 구성원 전체가 총출동하는 그들의 성대한(big fat) 잔치문화가 생생하다. 전통에 대한 그리스인의 남다른 자부심이 그 바탕이다. 미국으로 이주한 그리스 가정의 딸 툴라가 미국 청년을 배우자로 데려온다. 툴라의 아버지는 “이 세상에는 그리스인과 그리스인이 아닌 사람 두 종류가 있다”고 주장해온 인물. 그는 예비 사윗감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네 조상들이 나무를 탈 때 우리 조상은 철학을 논했다네.”

툴라의 아버지는 일본어 ‘기모노’가 그리스어 ‘히모나(겨울)’에서 왔다고도 주장한다. “추워지면 뭘 걸쳐야 하기 때문”이라는 말도 안 되는 설명을 덧붙여가면서. “모든 언어의 근원은 그리스어”라는 그의 궤변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에 대한 자존감이 터무니없어 보이지만은 않았던 이유는, 그리스가 그만큼 서구 문명의 근원으로 인식돼왔기 때문일 터다. 그리스 신화와 문학, 철학은 인류 문화의 화수분이었다. 유럽에서 이런 인식은 거의 절대적이다. 유럽이라는 이름부터 그렇다. 제우스신이 흰색 황소로 변신해 납치한 페니키아의 공주 ‘에우로페’의 이름에서 왔으니 말이다.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했을 때 로마인들이 만사 제쳐두고 한 일은 그리스 귀족들의 서가에 꽂힌 서적과 예술품을 실어나르는 것이었다. 지성인에게 그리스 문학작품 읽기는 필수였다.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가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했지만, 오히려 그리스가 미개한 정복자를 지배했다”고 말한 이유다(정혜신, 『그리스 문화 산책』). 하긴 『로마인 이야기』의 시오노 나나미도 “로마인들은 지성에서는 그리스인보다 못했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최근의 재정위기를 보면 지성과 전통은 빚 앞에 속수무책이다. 유럽 언론들은 그리스를 포르투갈·이탈리아·스페인과 한데 묶어 ‘돼지(PIGS)’라는 굴욕적 표현을 쓰고 있다. 연금 등 복지에 개념 없이 돈을 퍼 쓴 도덕적 해이와, 구제금융을 받더라도 갚을 능력이 거의 없다는 현실은 ‘돼지’를 궁지에 몰고 있다. 그들의 조상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시기 전 제자 크리토에게 “에스쿨라피오스에게 수탉 한 마리 빚진 게 있으니 잊지 말고 갚아주게”라고 부탁했다. 애당초 그리스가 빚 갚기를 당부하고 떠난 선조의 사례를 기억했더라면 오늘날 ‘돼지’라 불리는 수모는 겪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기선민 문화스포츠 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