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리티의 소리] '며느리를 위한 시' 를 읽으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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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내가 가입한 여자들만의 동호회에 며칠 전 재미있는(사실은 슬픈) 장편의 시가 한 편 떴다. 온라인상에 돌아다니고 있는 작가 미상의 글을 시솝이 퍼온 것이다. 이름하여 '며느리를 위한 시' . 그 일부다.

…음식장만 내가 했네 지네들은 놀았다네/절하는 건 지들이네 이내몸은 부엌있네/제사종료 식사하네 다시한번 바쁘다네/이내손은 두개라네 지들손은 졸라많네/그래봤자 내가하네 지들끼리 먹는다네/

…손님들이 일어나네 이제서야 간다하네/바리바리 싸준다네 내가 한거 다준다네/아까워도 줘야하네 그래야만 착하다네/남자들도 일한다네 병풍걷고 상접었네/무지막지 힘들겠네 에라 나쁜 놈들이네/

…명절되면 죽고싶네 일주일만 죽고싶네/십년동안 이짓했네 사십년은 더 남았네.

질펀한 욕설과 풍자로 풀어낸 사사조 음절의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감지했다. '민족의 명절' 추석이 오기 이미 오래 전부터 여자들에게 명절병이 돌고 있구나.

남자들은 곧잘 투덜거린다. 여자들 마음은 밴댕이 소갈딱지지, 그깟 2~3일, 1년이면 4~5일, 딴 사람도 아니고 가족을 위해 보내는 게 그렇게 견디기 힘든가.

그러고 보면 사람들은 곧잘 착각을 한다. 우리 여자들의 명절병이 단지 명절의 중노동이 싫어서 생기는 병쯤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명절은 부계혈통 중심의 결혼문화가 안고 있는 모든 부조리를 응축시켜 놓은 날이다. 사실 풍요롭고 날씨 좋은 추석과 한 해를 마감하고 새해를 여는 의미있는 설날은 여성들에게도 탐나는 명절이다. 여성들도 그 명절엔 그리운 사람들과 만나 모든 걱정.근심을 덜고 싶다. 그러나 현실은 어디 그런가.

먹고 마시며 일하지 않는 남자들과 하루 종일 부엌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 여자들, 같은 여자지만 올케의 처지를 외면하는 시누이, 모처럼 모인 자식들의 입호사를 위해 며느리들을 다그치는 시어머니, 애꿎은 심리전으로 마음까지 지쳐버리는 동서들, 이제나 저제나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보고 싶은 친정 부모와 형제, 고생은 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주인은 될 수 없는 남편 집안의 조상봉사….

그러니 이런 명절에 며느리가 행복하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을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바로 이런 가족 내의 부당함과 소외가 여자들을 아프게 만든다. 여자들은 그렇다.

먼저 몸이 아프다. 게다가 아프고 괴로운 걸 드러내지 말고 행복한 척하라고 하니 더욱 더 안으로 안으로 아플 수밖에.

몇해 전부터 여자도 행복한 명절을 만들자는 목소리가 드높다. 남자가 설거지하기, 음식 같이 만들기, 친정에도 번갈아 가기 등의 온갖 방법론이 매스컴에 소개되고 있다. 세상 정말 달라졌다.

그러나 '여자들의 일 덜어주기' 같은 애교 넘치는 처방만으로 명절이 즐거워질 수는 없다. 추석을 진정한 '민족의 명절' 로 만들기 위해서는 정말 근본적인 처방이 필요하다. 그것은 가족 구조의 근본적인 변화다.

남자 한 명만을 한 가족의 정점에 두고 그를 가장이라고 이르며, 그를 중심으로 가족의 질서를 만드는 문화, 그리고 남편의 성만을 자식에게 계승하면서 그 혈통의 중요성만 강조하는 권위적인 가족이 있는 한 가장 아름다운 명절인 추석에서 여성들의 소외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박미라< 페미니스트 저널if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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