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배두나 "내 또래의 삶 이제 알것같아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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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삶이란 거목이 있다. 그리고 당신은 나무꾼이다. 아래가 청춘, 위가 노년이라면 당신은 어느 부분을 택하겠는가. 많은 사람은 아래를 가리킬 것이다.

희망과 에너지로 충만한 시기니까. '고양이를 부탁해' (정재은 감독.10월 12일 개봉)는 그 젊음을 응시한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거친 사회에 뛰어든 20세 아가씨 세 명의 얘기다.

그런데 영화는 처음부터 기대를 저버린다. 젊음을 상징하는 장밋빛 미래와 거리가 멀다. 치열한 생존경쟁에 뛰어든 청춘의 꺾임을 낚아챈다.

그렇다고 비관을 앞세우진 않는다. 다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자는 소박한 뜻이다. 과장도, 윤색도 없이 주변을 솔직하게 보자고 권유한다. 주인공 세 명이 대학에 가지 못한 인천의 여상(女商) 졸업생들이니, 그들에게 "앞날은 창창하다" 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거짓일 수 있겠다.

'고양이를…' 의 복판엔 배두나(22)가 있다. 사실 스무살의 그는 영화 속 상황과 동떨어져 살았다. 거리에서 우연히 발탁돼 패션모델.탤런트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특유의 중성적.반항적 마스크로 n세대 선두주자로 떠올랐다.

"그래요. 전 강남의 스무살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정신없이 지냈죠. 그런데 영화에선 인천의 스무살로 나오죠. 아, 내 친구들은 이렇게 사는구나, 이런 고민이 있구나 하는 점을 깨달았다면 과장일까요. "

까르르 웃는 모양에서 아직도 어린 티가 풀풀 느껴진다. 하지만 그는 참으로 묘한 배우다. 절대 자기 색깔을 드러내지 않는다. 무색무취란 표현까지 있다.

역으로 극적 상황에 몰입하는 능력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뜻도 된다.

출연했던 영화들이 그랬다. 지난해 '플란다스의 개' (봉준호)의 아파트 경리 현남, '청춘' (곽지균)의 간호사 남옥 모두 모난 개성보다 밋밋한 평범함으로 무장한 캐릭터였다. 그럼에도 그는 건재했다. 강렬한 후광을 남기진 않았지만 '그 영화엔 배두나가 있었지' 하는 확실한 여운을 심었다.

'고양이를…' 의 태희도 예외는 아니다.

졸업 후 1년이 되도록 취직을 안하고 아버지가 운영하는 찜질방의 카운터를 지킨다. 뜻이 맞지 않아 갈라진 친구들을 모으고, 뇌성마비 젊은 시인을 도와주는 천사표 아가씨다. 선원이 되기를 꿈꾸고, 외국 생활을 동경하는 몽상가 기질도 있다.

"영화 경력 2년인데 연기력이 얼마나 늘었겠어요. 단 하나 욕심을 부렸다면 최대한 배역에 가까워지려고 했어요. 예쁘고 귀여운 배우가 아니라 작품 속에서 살아 숨쉬는 배우라고나 할까요. 억지 치장은 연기로 볼 수 없거든요. "

성숙한 발언이다. 그의 앳된 얼굴과 불협화음마저 일으킨다. 그러나 느낀 바를 그대로 털어놓는 솔직함을 의심할 정도는 결코 아니다.

실제로 그는 영화 속 태희를 닮으려고 동대문 새벽시장을 훑으며 촌스러운 의상.소품 등을 골랐다. 그리고 그것들을 입고, 끼며 살았다. 비유컨대 생활연기론?

담배 무는 장면을 표현하려고 부모.동생 앞에서 연습까지 했다. 그래도 "서투르기 그지없다" 며 침울해진다. 담배 피우는 심정을 꿰뚫 수가 없었다나!

"처음엔 출연을 거절했어요. '플란다스의 개' 와 흡사한 인물로 보였습니다. 또 작품을 끌어가기엔 아직 역부족이라고 생각했어요. 감독님의 단편 '도형일기' '둘의 밤' 을 보고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화면은 말끔하지 않아도 삶의 긴장감이 넘쳤거든요. 이번 영화도 마찬가집니다. "

"그래도 인물들이 너무 가난해 보인다" 고 하니 "대다수 젊은이가 바로 그런 처지에 있는 게 아닙니까" 라며 반문했다. 또 흥행에 성공할진 알 수 없지만 평소 하고 싶었던 역할, 그래서 부담없이 빠질 수 있는 배역이니 얼마나 큰 행복이냐고 즐거워했다.

그는 '고양이를…' 에서 드라마 '푸른 안개' 로 급상승한 이요원과 모델 출신의 신인 옥지영과 호흡을 맞춘다. 증권사 사환으로 입사해 성공을 꿈꾸다가 결국 무너지는 혜주(이요원)와 찢어질듯한 빈곤에 하루하루 절망하는 지영(옥지영)을 훈훈하게 감싸안는다.

개똥이 굴러도 깔깔댔던 어린 소녀들의 혹독한 사회 입문기를 차분하게 그려나간 여성 감독 정재은의 시각도 균형이 잡혀 있다.

배두나의 차기작은 'JSA' 팀이 다시 뭉친 '복수는 나의 것' (박찬욱). 운동권 출신의 강인한 여성으로 변모한다.

상대역은 신하균. 때마침 신하균이 출연한 '킬러들의 수다' (장진)가 '고양이를…' 와 같은 날 개봉한다. "어쩌지, 어떡하지. " 발을 동동 구른다.

글=박정호 기자.사진=최승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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