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이화여대 석좌교수 은퇴강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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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어령 이화여대 석좌교수(중앙일보 고문)는 7일 오후 3시 이대 국제교육관 대형 강의실에서 '햄록을 마신 뒤 무엇을 말해야 하나' 라는 제목으로 은퇴 특별강연을 했다. 다음은 강연 요지.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나' 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 시(詩)요, 문학이다. 나는 획일화한 지식풍토와 대량생산체제의 교육풍토에 분노를 느끼고 맞서 싸워왔다. 그것이 내 강의의 존재이유였다.

소월의 '진달래꽃' 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학교에서 이 시는 '이별가' 로 가르쳐 왔다. 그러나 이 시의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이나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의 시제는 모두 미래형이다. 화자는 가정적 체험을 통해 이별의 슬픔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고한 사랑의 기쁨을 노래하는 것이다.

이처럼 시의 이중적이고 아이러닉한 의미를 파악하게 되면 사물의 의미나 느낌을 흑백으로 재단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알게 된다. 시의 공화국에서 흑백 사이의 '회색' 은 기회주의의 상징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고 삶의 체험을 깊게 하는 이상향이다.

반대의 일치, 아이러니 시적 구조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소월의 시 읽기는 흑백논리의 가시철망을 끊고 무한한 상상의 벌판으로 나가도록 하는 강철가위였다. 소월의 시에서 보여주는 반대의 일치, 즉 극한의 부정을 통해 긍정을 이끌어내는 역설을 소크라테스가 마신 독약의 이름에 빗대 '햄록효과' 로 부르고자 한다.

플라톤은 '파이돈' 이란 책에서 소크라테스가 햄록을 앞에 놓고 친구.제자들과 나눈 마지막 담론을 소개하고 있다. 소크라테스 앞에 놓인 햄록은 그가 마지막으로 남기려 한 담론의 발화점이었다.

철학자에게 햄록이 얼마나 무기력한 것이며, 무의미한 것인지를 증명하는 것이 그의 마지막 강의였다. 육체에서 분리된 영혼의 아름다움, 죽음 후에도 저 세상에서 최대의 선(善)을 얻을 수 있는 영혼불사(靈魂不死)를 통해 소크라테스는 육체의 죽음과 삶이라는 이분법에서 초연할 수 있었다.

'햄록효과' , 즉 역설과 같은 복합적인 의미가 없을 때 세계를 영과 육, 흑과 백이란 이분법적 시각으로만 파악하게 된다. 우리는 그런 극한상황에서 너무나도 오래 살아왔다. 그로 인해 상상력과 지식이 만들어내는 '그레이 존(gray zone)' 이 폭격당해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졌다.

오늘날 과학에서도 흑백의 세계는 통용되지 않는다. 시의 아이러니와 복합적인 언어체험은 흑백대결 속에서 비겁한 회색분자로 오해받을지 모르나, 그같은 양극의 구조 속에서 진리를 얻기 힘들다.

*** 열띤 강연 3시간

이어령 교수의 은퇴강연장은 7백여명의 청중으로 입추의 여지 없이 메워졌다.

3시간여 이어진 강연회에서 이들은 이교수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특유의 재담이 나올 때는 웃음을 터뜨리는 등 호흡을 같이했다.

장상 이대총장은 인사말에서 "이교수는 참신한 아이디어, 상상력을 이 사회를 위해 아낌없이 나누어준 정이 많은 사람이었기에 이 자리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였다" 고 소개했다.

문학평론가.소설가.일본문화연구가.문예지 편집인.문화부장관.88올림픽 기획자.대학 교수 등 넓은 활동영역이 말해주듯 이날 강연회에는 사회 각계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많이 참석했다.

이교수의 강연을 경청한 소설가 최인호씨는 "알퐁스 도테의 소설 '마지막 수업' 에서는 '프랑스 만세' 를 외쳤는데 나는 이번 고별강연에서 동서고금을 잇는 참신한 상상력으로 현실에 신명을 부른 '이어령 교수 만세' 를 외치고 싶다" 고 밝혔다.

이교수는 "나는 지식이라는 금덩어리가 아니라 지식을 창조하는 상상력의 지팡이, 지혜의 지팡이를 놓고 간다" 며 강단을 내려갔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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