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해신 - 제1부 질풍노도 (2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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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나는 이왕 이곳에 온 이상 비극의 왕자였던 홍문천왕, 즉 대우 왕자의 무덤을 찾아가리라고 결심했던 것이었다.

대우 왕자의 묘는 미데라의 외곽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한 때는 사찰의 소유였으나 이제는 많은 땅의 일부를 시(市)에 기증했는지 고등학교.소방서.경찰서 등 많은 공공건물들이 경내에 들어서 있었다.

그 길을 따라 나는 빠르게 걸었다. 아직 해가 많이 남아있었으나 깊은 만추의 계절이었으므로 언제 갑자기 해가 뉘엿뉘엿 기울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었다.

한 십여분 걸어갔을까. 거리에 선 작은 표석(標石)에 다음과 같은 글자가 새겨진 것을 나는 보았다.

'홍문천황어릉(弘文天皇御陵)'

나는 표석이 가리킨 방향을 따라 산길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대우 왕자.

백제의 유민을 받아들여 오미에서 '신백제' 를 건국하려 하였던 천지의 아들 대우. 그에 대해서 일본의 유명학자 나카니시 스스무(中西進)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때 대우 태자의 나이는 25세. 대장부로서의 대범한 풍채와 천지 천왕의 장자로서 적합한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한 때 당나라의 사자가 내조하였을 때 일본과 다른 풍채를 가지고 있었다 하였으니, 혹 그의 핏줄 속에는 대륙의 피가 흐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때문인지는 모르나 태자는 백제로부터 도래한 학자들을 좋아하여 빈객(賓客)으로 맞이하여 언제나 백제의 학문을 배우고 있었다.

두뇌가 명석하고, 문장이나 논리가 뛰어나서 빈객들이 그의 넓은 학식에 감탄하였다고 한다. 백제 유민들의 도래기간이 7년이라 생각한다면 대우 태자는 7년이란 세월을 제일 가는 백제의 지식인들에 의해서 풍부한 제왕학(帝王學)을 배우며, 오미 조정의 제2인자로 성장한 것이다. 태자가 일본 사상 최초의 시인이 되어 시가집인 '회풍조(懷風藻)' 에 두 수의 시를 남기고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

나카니시의 표현대로 대륙의 피를 받았고, 백제의 지식인들로부터 제왕학을 공부하였던 대우 왕자는 지금도 남아있는 비와(琵琶)호숫가, 세타(瀨田)의 대교(大橋)에서 작은 아버지 천무와 결전을 벌인다.

이 전투에서 비참하게 패배한 대우 왕자의 최후에 대해서 '일본서기' 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672년 7월 23일.

대우 왕자는 마침내 도주할 길이 없어져서 다시 돌아와 야마사키(山削)에 숨어서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이때 좌우대신이나 군사들은 다 흩어지고 한두명의 사인(舍人)만이 왕자를 따르고 있었다. "

마침내 조카를 죽이고 천하를 얻은 천무는 목을 매어 죽은 대우 왕자의 시신을 이곳에 파묻고 성대한 장례를 치른 것이었다. 그리고 이곳에 조카의 넋을 기리는 사찰을 세울 것을 지시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대나무 숲이 우거진 산길을 오르면서 나는 문득 번뜩이는 영감을 받았다.

이곳 일대에 살고 있던 오토모(大友)씨들은 자신의 성을 비극적으로 죽은 대우 왕자의 이름에서 빌려온 것이 아니었을까. 이곳 오미지방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백제가 멸망했을 때 신백제를 건설하기 위해서 도읍을 옮긴 대왕 천지를 따라왔던 유민들. 이들은 대우 왕자가 죽자 자신의 정신적인 지주를 잃었던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의 성을 대우로 바꾸고 이곳에서 자치적인 토착세력으로 성장한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 속담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오미(近江)사람 앉은 자리에는 풀도 나지 않는다. "

조선에 의해서 고려가 멸망했을 때 왕도였던 개성 사람들은 신왕조에 협력하지 않고 상인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이곳 오미 사람들은 천무가 이끄는 새 왕조에 협력하지 않고 상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앉은 자리에는 풀이 나지 않는다' 는 근검절약의 독한 마음으로 일본 제일의 상인으로 성장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사람들은 아직도 오미를 '상인의 고향' 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홍문천황의 능은 산 언덕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산록에는 다음과 같은 팻말이 세워져 있었다.

'홍문천황장등산전릉(弘文天皇長等山前陵)'

그러나 말이 천왕의 어릉이지 실은 초라한 무덤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에서 수많은 왕들의 거대한 무덤을 보는데 익숙해져 있던 나는 간신히 봉분만 남아있는 비극의 왕자 대우의 무덤을 본 순간 깊은 감회에 사로잡혔다.

글=최인호

그림=이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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