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유로화 다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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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모든 기업가의 공통적인 취미는? 화폐수집. "

기업가는 이익을 내는 게 일이란 걸 빗댄 농담이다.

화폐, 특히 지폐의 도안은 우표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각국의 역사관과 문화관을 보여준다. 지폐에는 으레 그 나라가 내세우는 문화유산이나 위인의 얼굴이 들어간다. 프랑스의 프랑화에는 작가 생텍쥐페리의 초상이 든 것이 있는데 문인을 존중하는 풍조를 나타낸다고 풀이하는 사람이 많다. 독일 마르크화에는 작가인 그림 형제, 음악가 슈만과 더불어 수학자 가우스의 얼굴이 보인다.

미국의 달러화엔 건국의 아버지인 조지 워싱턴의 얼굴이 들어 있다. 영국 돈은 엘리자베스2세 여왕의 초상을 담고 있다. 이집트의 1파운드 지폐에는 고대 파라오였던 람세스2세의 초상과 아부심벨 사원이 들어 있다. 중국 인민폐 중에는 마오쩌둥(毛澤東).주더(朱德).류샤오치(劉小奇).덩샤오핑(鄧小平)이 나란히 든 것이 있다. 문화혁명의 책임자인 毛와 희생자인 劉, 개혁.개방을 주도한 鄧을 나란히 세운 것은 중국식 역사화해의 시도라고 볼 수 있겠다.

일본의 1만엔권 지폐에는 19세기 말 한국을 정벌하자고 주장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초상이 들어 있다. 일본에선 개화사상가라지만 우리 입장에선 괘씸한 인물이다. 이렇듯 화폐는 각국 고유의 정체성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앞으로 유럽연합(EU) 10여개국이 공동으로 사용할 유로화 지폐에는 연결을 상징하는 다리가 들어간다. 특정 국가의 인물이나 문화재를 넣을 경우 통합정신에 어긋날 뿐더러 서로 자국의 입장을 내세워 다툴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취한 고육지책이다.

각국의 경쟁심리를 누르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 다리 도안을 창작해 넣기로 했는데 안이 제시될 때마다 실제 다리와 비슷하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아치형 돌다리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레알토 다리, 이층 돌다리면 프랑스.스페인.이탈리아에 남아 있는 고대 로마의 다리가 연상된다는 것이다.

최근 방북단의 만경대 파문으로 나라가 시끄럽다. 통일정책에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제대로 강조되지 않은 데다 일부가 조급하게 구는 바람에 생긴 사고가 아닌가 싶다. 민족의 염원인 통일로 가는 길에 다리가 필요하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튼튼한 돌다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채인택 국제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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