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안에 침묵 '창작과비평' 기회주의 심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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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당대의 핵심적인 관심사에 대하여 성실한 대응을 하지 않은 잡지를 과연 제대로 된 정론지라 할 수 있을까?" (권성우). "이제 '창작과비평' 은 관조적 진보주의를 고수하는 공룡과도 같은 문화권력으로 전락해버린 것은 아닐까? 실천성 없는 세련된 담론의 축제에 빠져들고 있는 것은 아니냐 이 말이다. " (이명원)

진보적 문학과 사상의 '큰집(宗家)' 이랄 수 있는 계간지 '창작과비평' (이하 '창비' )이 일부 평론가들에 의해 비판을 받고 있다. 계간지 '사회비평' 가을호는 특집으로 '창비의 정체성을 묻는다' 를 싣는다.

이 특집에서 문학평론가 권성우.구모룡.이명원씨는 위와 같이 '권위주의.상업주의.기회주의가 아니냐' 며 '창비' 의 정체성을 따지고 있다.

이명원씨는 "최근의 '창비' 가 보여주는 문제점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이 기회주의" 라고 공박했다.

최근 불거지고 있는 정치.사회적 현안들에 대한 '창비' 의 침묵을 예로 든 이씨는 "정작 현실적으로 실천하고 투쟁해야 될 부분에 대해서는 완고한 침묵을 지키면서도, 원론적이며 추상적인 차원에서만 진보와 개혁의 메시지를 발산하는 것은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얻으려 하는 기회주의의 발로" 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권성우씨는 " '창비' 의 몇가지 문제점들은 이 땅에서 과연 진보적 지성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며 '창비' 의 진보성 자체를 따지고 있다.

과거의 진보.보수라는 이분법적 틀로는 권위주의.상업주의 등으로 비판받는 최근의 '창비' 의 행보와 선택이 명쾌하게 해명될 수 없기에 "실질적으로 '창비' 는 진보에 해당되지 않는다" 는 권씨는 "이제 진보라는 개념 자체가 재구성돼야 한다" 고 주장했다.

탈권위.탈중심의 논리가 일반화되고 있는 이 시대, 그 어떤 중심과 주류.권위도 다양한 방식의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엄혹한 군사독재와 반공 이념의 시대였던 1966년 창간돼 지난 35년간 기성의 권위와 제도에 대항하며 민주화와 진보 진영을 이끌어온 '창비' 도 이제 스스로가 하나의 중심과 권위로 자리잡아 거기에 편입되지 못한 일부 논자들의 집단적 공격을 받기에 이른 것이다.

최근 출간된 '창비' 가을호는 '개혁시대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란 권두언을 통해 작금의 사회와 지적 풍토에 대한 고민과 지향점을 내비치고 있다.

"이럴수록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다양한 인간, 이질적인 시각들이 어떻게 공존하면서 더 높은 수준의 공동체를 실현해갈 수 있는가에 대한 숙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중략)절차적 민주주의를 넘어서, 삶의 원칙과 방식으로서 민주주의를 다시금 확인하는 작업이 절실하다. " 더 높은 수준의 공동체를 위해 다른 입장과의 공존을 모색하려는 '창비' 가, 그로 인해 들을 수 있는 '공룡화된 권위주의.상업주의.기회주의' 란 비판을 어떻게 수용 혹은 비판할지 주목된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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