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단지유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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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남의 친환(親患.부모의 병)에 단지(斷指)한다' 는 속담이 있다. 남의 걱정에 지나치게 개입하는 오지랖 넓은 사람을 핀잔하는 말이다.

속담이 시사하듯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부모의 병환에 정 차도가 없을 때 자식이 손가락을 잘라 나온 피를 공양하는 일은 지극한 효심의 표현이자 일종의 비방으로 통했다.

이른바 단지공양(斷指供養)이다. 피를 내는 데 그치지 않고 아예 자른 손가락을 끓여 바쳤더니 부모의 병이 나았다거나, 길게는 6년이나 부모의 변을 맛보면서 간호해 병을 고쳤다는 등의 옛 기록들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

허벅지 살을 베어 바치는 할고공양(割股供養)도 효도의 극단적인 방법으로 통했다. 요새 감각으로야 미담은커녕 '엽기' 로 치부되겠지만.

원대한 목표를 향한 결의를 다질 때 단지를 하기도 한다. 안중근 의사가 1909년 동지 11명과 함께 단지동맹을 맺으면서 손가락을 자른 일은 그야말로 '구국의 결단' 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평소 "대통령을 위해서라면 손가락이라도 자르겠다" 고 말하던 여당의원이 지난해 말 일으킨 당적 이동 파문은 '구국' 과는 동떨어진 처사로 비난받았다.

똑같은 행위도 동기나 행위주체.정황에 따라 숭고한 희생이 되기도 하고 엽기적인 자해(自害)로 전락하기도 한다.

일본 조직깡패(야쿠자)들의 단지(유비쓰메) 풍속은 후자의 대표적인 예다. 일본 내 술집에서는 짧은 머리.험상궂은 표정에 왼쪽 새끼손가락마저 한두마디가 달아나고 없는 남자들이 나타나면 순식간에 분위기가 얼어붙곤 한다.

일본 도쿠가와 막부 시대의 기생들 사이에도 손가락을 잘라 정인(情人)에게 선사하며 사랑을 맹세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서는 조직에 사죄나 맹세의 뜻을 표시하는 야쿠자의 전매특허 의식처럼 돼 버렸다.

방법이 끔찍하고 비정상적인 데다 조상들의 지극한 효도방식보다 자해 측면에 먼저 눈길이 쏠린다는 점에서 단지는 바람직하지 못한 행위다.

며칠 전 일본 총리의 신사참배에 항의하는 뜻으로 몇몇 '열혈시민' 들이 단지를 했지만, 자세한 경위는 차치하고 아이들이 볼까봐 눈부터 가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매사 감정이 앞서면 사태의 본말이 뒤집히기 쉬운 법이다.

노재현 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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