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해신 - 제1부 질풍노도 (1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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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제1장 붉은 갑옷

가쓰요리는 죽은 아버지를 살아있는 사람으로 위장하기 위해서 '가게무샤(影武者)' 를 사용한 사실을 철저하게 비밀에 부쳤다. 심지어 아버지 다케다 신겐의 여덟 형제에게도 이를 알리지 않았다.

'가게무샤' 는 다케다 신겐의 옷을 입고, 신겐처럼 말을 하고, 신겐처럼 행동하고, 신겐처럼 밤이면 처소에서 잠을 잤다.

'영웅은 호색' 이라 하였던가. 생전에 여색을 좋아했던 신겐은 밤이면 여인을 바꿔서 잠을 자곤 하였는데 '가게무샤' 는 이를 흉내 내어 자신도 신겐처럼 처소를 골라가면서 잠을 자곤 하였다.

그러나 천하의 비밀도 때가 되면 언젠가는 자연 드러나는 법. 감쪽같던 '가게무샤' 의 비밀이 그 틈을 보이게 된 것은 전혀 엉뚱한 사건에서부터였다.

생전에 다케다 신겐은 '흑마(黑馬)' 라고 불리는 애마를 타고 다녔었다. 잡티가 하나 없이 완벽한 검은 말이었는데 원래는 야생마 종자였으므로 성격이 사납고 거칠었다. 그 야생마를 다룰 수 있는 것은 신겐뿐이었던 것이다.

신겐의 역할을 해야 할 '가게무샤' 이고 보면 자연 이 말 위에 올라타서 전군을 열병(閱兵)하여 자신의 건재를 만방에 알릴 필요가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말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주인을 알아보는 법. 더구나 명마이고 보면 한갓 주인으로 위장한 좀도둑 '가게무샤' 의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결국 '가게무샤' 는 전군이 모인 자리에서 마상 위에서 떨어져 낙마하였던 것이었다. 가쓰요리의 도움으로 간신히 자리를 피한 '가게무샤' 에 대한 소문은 즉시 사방으로 번져나갔다.

다케다 신겐이 애마 위에서 낙마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처음으로 이상하게 느낀 사람은 바로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이었다. 다케다 신겐이 '가이(甲斐)의 호랑이' 라고 불렸다면 우에스기 겐신은 '에치고(越後)의 용' 이라고 불렸던 천하의 숙적이었다.

두 사람의 전투는 11년간 무려 여섯번이나 계속되었는데, 그것은 주로 우에스기가 지배하고 있던 영토를 거쳐야만 바다로 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겐이 지배하고 있던 영토는 후지산 일대의 내륙지방이었으므로 바다가 없어 소금을 구할 수 없는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었을 뿐 아니라 바다를 통한 외국과의 교역이 없었으므로 자연 해외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어두웠던 것이었다.

두 사람의 군사적 능력은 거의 백중하였고, 여섯번 싸워도 결판이 나지 않을 만큼 그들이 갖고 있는 군단의 전력도 거의 호각지세였지만 두 인물은 극히 대조적이었다.

다케다 신겐이 지극히 현실주의자적 야심가였던 것에 비하면 우에스기 겐신은 의리.신념을 앞세운 이상주의적 무사였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의 능력을 인정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인품으로도 서로 존경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한때 다케다 신겐이 동맹국이었던 '스루가(駿河國)' 와 단교하여 소금을 금수당해 고통을 받고 있다는 말을 들은 우에스기는 신겐에게 서슴없이 소금을 보내주었다. 이 역사적 사건은 '적에게 소금을 보낸다' 는 일본의 유명한 속담의 연유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 우에스기이고 보면 신겐이 자신의 애마 '흑마' 위에서 낙마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누구보다 먼저 수상한 낌새를 눈치 챈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가게무샤다. '

우에스기는 들고 있던 부채로 자신의 무릎을 내려치면서 말하였다.

'신겐은 죽었다. '

그러나 말에서 떨어졌다는 그 소문 하나만으로 다케다 신겐이 죽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우에스기뿐 아니라 오다 노부나가의 첩자들도 다케다 진영에 숨어들어 온갖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지만 천하의 지략가였던 우에스기는 신겐이 과연 죽었는가, 아니면 우연히 말 위에서 낙마하였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비상수단을 사용하였던 것이었다.

비상수단.

우에스기가 사용한 비상수단은 그 자신만이 알 수 있는 독특한 방법으로 다케다 신겐의 애첩을 이용하는 생간(生間)수법이었던 것이었다.

글=최인호

그림=이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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