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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 직후 미국도 “이승만 물러나야” 압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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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4·19 혁명 때 부상당한 학생을 위문하는 이승만 대통령. 그때 그는 “젊은이들이 분노하지 않으면 젊은이가 아니다”는 말로 청년학도들의 희생을 높이 평가했다.(출처: 『대한민국 정부 기록사진집 4』, 국정홍보처, 2000년)

1960년 4월 18일 고려대생들의 시위는 4·19 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지폈다. 이제 대구의 2·28 시위와 마산의 3·15 의거 이래 학생시위를 이끈 주역은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으로 바뀌었다. 서울시내 모든 대학과 주요 고등학교 학생들이 가두로 나온 이튿날. 경무대 앞에 진출한 시위대를 겨눈 경찰의 발포에 186명의 미처 못다 핀 꽃봉오리가 스러져 갔다. “누적된 부패의 부정과 횡포로써 민심을 유린하고 민족적 참극과 국제적 수치를 초래케 한 현정부와 집권당은 그 책임을 지고 물러가라.” 교수들의 시국선언이 나온 다음 날인 26일 오전 10시30분 학생대표를 만난 이승만은 조건부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그 지긋지긋한 놈의 사진을 떼어서/ 조용히 개굴창에 넣고/ 썩어진 어제와 결별하자/ 그놈의 동상이 선 곳에는/ 민주주의의 첫 기둥을 세우고/ 쓰러진 성스러운 학생들의 웅장한/ 기념탑을 세우자/ 아아 어서어서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자.” 바로 그날 시인 김수영은 독재자에게 정치적 사망선고를 내렸으며, 시위대는 탑골 공원에 서 있던 그의 동상을 끌어내렸다.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하겠다.” 그때 이승만은 자신이 물러나는 것을 국민이 원하지 않는다고 강변하며 권좌에서 버틸 수도 있었다. 그런데 왜 바로 다음 날인 27일 오후 대통령 사직서를 국회에 제출했을까? 하루 전 오전 9시10분. 매카너기 미국 대사는 김정렬 국방장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즉시 이 대통령을 만나 학생대표단 면담, 선거 재실시에 관련된 성명발표, 이 대통령의 향후 정치적 역할에 대한 고려 등을 건의하라.” 10시15분 국민이 원하면 사임하겠다는 조건부 하야 방침이 매카너기에게 통보되었다. “너무 오랫동안 너무 많은 일을 해온 연로한 정치가는 책무로부터 벗어나 존경받는 자리로 은퇴하는 것이 좋다.” 10시40분 이승만을 만난 매카너기는 지금이 바로 물러날 때라고 압박을 가했다.

4·19 혁명이 터지자 미국은 군부에 정치적 중립을 지키도록 지속적으로 신호를 보냈고, 이승만에게도 세 차례에 걸쳐 직접적으로 퇴진을 종용했다. 임창순 교수의 증언에 의하면 대학교수단의 시위도 미국의 종용에 따라 일어난 것이었다. 아래로부터의 힘에 의한 정부 전복이 공산화를 촉발할 경우 반공의 보루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미국의 우려가 이승만에 대한 지지철회의 주된 이유였다. 미국의 원조 없이는 국가의 존립이 어렵던 그때 4·19 혁명은 미국의 개입과 지지가 있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미국이 이승만과 선긋기에 나선 결정적 모멘텀은 민주주의의 제단에 몸과 마음을 바친 학생들의 희생에서 찾는 것이 합당하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