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평] 국가홍보 제대로 합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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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초등학교 시절 해외출장을 다녀 온 아버지가 사다 주신 지구본은 어린 나에게 무척이나 재미있는 놀이 기구였다.

입체적인 지구본에 그려진 세계 여러 나라의 모습과 교과서 평면에 그려진 국가들의 모습이 서로 얼마나 같은지 혹은 다른지를 비교하는 일은 어린 나에게 매우 흥미로운 일이었다.

***지도 '일본해' 표기 왜 많나

또한 당시 우리가 부러워하던 선진국가들 가운데 어떤 나라가 큰 나라이고 또 어떤 나라가 작은 나라인지를 확인해 보는 일도 재미있기는 매한가지였다. 당시 내 눈에는 엄청나게 큰 영토를 가지고 있고 거기다가 축구까지 잘하는 브라질이야말로 곧 세계를 제패할 가능성이 큰 무서운 나라로 보였다.

물론 이 모든 놀이는 우선 세계 각 나라의 지명이 영어로 어떻게 표기되는지를 알아야 하는 국제적인 지식을 요구하고 있었다. 아마도 아버지는 이 사실을 의식하고 나에게 의도적으로 영어로 된 지구본을 선물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당시의 나로서는 아버지의 그런 '불순한' 의도를 파악할 능력이 없었다. 다만 축이 기울어진 지구본을 앞뒤로 돌리면서 한국이 낮일 때 미국이 밤이 되는 까닭을 깨닫는 재미에 빠져들 뿐이었다.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기는 매한가지인 호주와 미국 가운데 호주는 왜 한국과 시간이 엇비슷하고 미국은 왜 시간이 반대인지를 이해하는 것 또한 지구본에 대한 나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지구본을 이리저리 돌리며 깨알 같은 영어 글자를 더듬거리며 읽고 있던 나의 눈에 정말 이상한 표기가 눈에 들어왔다. 다름아닌 'Sea of Japan' 이었다. 분명 우리말로 '동해' 를 뜻하는 영어 표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난데없이 '일본해' 라는 표기가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난 곧장 어른들을 붙잡고 그 까닭을 물었고, 대충 다음과 같은 설명을 들었다. 그 바다를 우리나라에서는 '동해' 라고 부르지만 일본에서는 '일본해' 라고 부르는데 이 지구본에 동해라는 표기가 없고 대신 일본해라는 표기가 있는 까닭은 일본이 우리보다 더 잘 살고 돈이 많아 외국 사람들을 상대로 홍보를 많이 했기 때문이라고.

그로부터 30여년이 흘렀다. 그 사이 우리나라는 산업화의 결과를 세계의 다른 여러 나라에 자랑할 정도로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일시적인 외환의 부족으로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기도 했지만 지구본을 가지고 놀던 때와 비교하면 분명 엄청난 발전을 이룩했다.

당시의 일본 그러니까 도쿄(東京)올림픽을 하던 일본과 비교해도 우리는 분명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일본보다 앞서 가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이 그렇고 또 정치적인 민주화의 수준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경제발전을 한 만큼 우리가 우리의 문화를 해외에 알리는 일에 어느 정도나 체계적인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우울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과연 이제는 외국에서 유통되는 지구본에 '일본해' 라는 표기보다는 '동해' 라는 표기가 더 많아졌을까. 확인은 못해 봤지만 영어로 표기된 지구본에는 아마도 여전히 '일본해' 라는 표기가 판을 치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국제교류기금 폐지 안돼

우리는 아직도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해외에 굴절 없이 알리는 작업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동남아 국가의 교과서에 한국의 역사가 왜곡돼 있다는 보도가 분명한 증거다.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그리고 태국의 교과서에 일본의 식민사관이 유포돼 한국의 역사를 일본이나 중국의 일부로 이해하고 있다니 달리 무슨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는가.

일본의 역사왜곡을 바로잡기 위한 대응이 냄비 물 끓듯 해서는 체계적인 국가홍보를 할 수 없다. 일본이야 한국의 역사를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있으니 규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치자.

그러나 다른 나라의 교과서에 우리나라의 역사가 왜곡된 일까지도 규탄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국가홍보가 절실하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한국국제교류재단' 의 위상과 역할은 더욱 강화돼야 한다. 국제교류기금의 폐지는 더욱 안될 말이다.

柳錫春(연세대 교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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